어른도 가끔은 ‘애착인형’이 필요하다[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2월 1일 14시 00분


마음(心)속 깊은(深) 것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살면서 ‘도대체 이건 왜 이러지?’ ‘왜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될까?’ 하고 생겨난 궁금증들을 메일(best@donga.com)로 알려주세요. 함께 고민해 보겠습니다.

사진 출처 Frontiers in Psychology
사진 출처 Frontiers in Psychology
직장인 유진수 씨(37)는 아직도 ‘사돌이’를 잊지 못한다. 사돌이는 유 씨가 다섯살 때 가지고 놀던 사자 인형의 이름이다. 사돌이는 잘 때나 밥 먹을 때 늘 유 씨 옆에 있었다. 하도 오랫동안 가지고 놀아서 솜이 다 죽고 꼬질꼬질해 못생긴 인형이었다. 그러다 어느날 부모님이 낡아서 볼품 없어진 사돌이를 유 씨 몰래 갖다 버렸다. 당시 부모님은 새 사자 인형을 여러개 사다주며 낙담한 유 씨를 달래봤지만, 세상에 사돌이를 대신할 사자 인형은 없었다.
인간은 마음이 힘들 때 포근하고 따뜻한 품을 찾도록 진화해 왔다. 촉각이 주는 마음의 위로 효과에 대해 알아보자. 게티이미지
인간은 마음이 힘들 때 포근하고 따뜻한 품을 찾도록 진화해 왔다. 촉각이 주는 마음의 위로 효과에 대해 알아보자. 게티이미지

‘다 큰 어른이 웬 인형?’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어렸을 때 가지고 놀던 애착 인형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는 것은 물론이고, 귀엽고 보들보들한 인형을 사모으는 어른이 적지 않다.

실제로 인스타그램이나 틱톡에서 부드러운 천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plush’를 검색하면 봉제 인형 관련 게시물 수백만 개가 나온다. 대부분 성인들이 수집하고 있는 인형들이다. 영유아용 애착 인형으로 알려진 영국 인형 브랜드 ‘젤리캣’은 어른들에게 더 인기가 많다. 미국 시장조사업체 서카나는 지난해 기준 전 세계 봉제 인형 시장 규모를 약 120억 달러(약 17조2300억 원)로 추정하며, 2030년까지 연평균 8%씩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한 브랜드에서 나오는 신상품 인형을 수집하는 애호가들이 많다. 틱톡 캡처(@thejellycatgirl)
한 브랜드에서 나오는 신상품 인형을 수집하는 애호가들이 많다. 틱톡 캡처(@thejellycatgirl)

성인이 인형에 열광하는 이유를 단지 키덜트(kid·어린이 + adult·어른, 어린이 감성을 소비하는 어른) 문화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장난감 중에 봉제 인형만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부드러운 촉감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부드럽고 포근한 촉감이 주는 심리적 위로 효과에 대해 알아보자.

● 어린시절엔 인형 벗삼아 독립 연습

어렸을 때 특정 인형이나 이불에 유난히 집착하던 경험이 있다면 잘 알 것이다. 꼬질꼬질해진 인형이나 이불을 세탁하는 날은 마르기도 전에 달라고 떼쓰는 통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낡아서 보기 싫다는 이유로 부모가 몰래 인형이나 이불을 버린 적이 있다면 큰 상실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인형이나 이불에 집착하는 모든 아이가 애정 결핍은 아니다. 영국 소아과 의사이자 저명한 정신분석학자인 도널드 위니콧은 1951년 발표한 연구에서 아이들이 잠들 때나 분리 불안을 느끼는 상황에서 인형, 담요같이 부드러운 애착 대상을 통해 스트레스를 낮추고 안정감을 찾으면서 독립을 연습한다고 설명했다. 아이가 커가면서 엄마에 대한 절대적인 의존성을 낮춰가는 발달 시기에 과도기적으로 나타나는 일시적 현상으로 본 것이다.

어린 아이는 부모가 없는 순간에 에착 인형이나 이불 등을 통해 두렵거나 힘든 순간을 견디는 연습을 한다. 게티이미지
어린 아이는 부모가 없는 순간에 에착 인형이나 이불 등을 통해 두렵거나 힘든 순간을 견디는 연습을 한다. 게티이미지

30년간 아동과 부모의 애착 관계에서 애착 이불(인형)의 역할을 연구해 온 리처드 패스먼 미국 밀워키 위스콘신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도 부모와 안정적인 애착 관계가 형성됐더라도 아이가 인형이나 이불에 집착할 수 있다고 봤다. 다만 부모와의 애착 관계가 불안정한 아이일수록 애착 물건이 주는 안정 효과가 더 강력한 것은 맞다.

● 포근한 품 찾는 것은 생존 본능

인간의 이런 특성은 성인이 되어서도 마음이 힘들 때 포근한 대상을 찾도록 진화해 왔다. 여러 신경생물학, 지각(知覺)심리학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는 기분이 안 좋을 땐 뇌에서 촉각 자극을 추구하고, 기분이 좋으면 시각 자극을 선호하도록 환경에 적응했다.

이는 생존 본능과 관련이 있다. 아기나 새끼 동물은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불안 같은 부정적 감정을 느낀다. 이때 따뜻하고 부드러운 보호자 품에 안기면 평소보다 더 큰 안정감과 만족감을 느낀다.

미국 심리학자 해리 헬로우가 1958년 발표한 ‘사랑의 본질’이라는 고전적 심리학 연구에서도 이는 잘 드러난다. 어미와 헤어져 분리 불안을 겪는 새끼 원숭이가 철사로 만든 어미 모형과 천으로 만든 어미 모형 중 어느것을 더 선호하는지 살펴봤더니, 천으로 만든 모형에서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심지어 철사 모형에는 젖병이 달려 있어 먹이를 먹을 수 있었음에도 불안한 새끼 원숭이는 먹이보다 정서적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더 좋아했다. 실험 시작 전에는 새끼 원숭이가 당연히 먹이를 주는 철사 모형에 더 애착을 느낄 거라고 생각했지만, 완전히 반대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후 실험에서는 천으로 만든 어미 모형에서 철사 못 같은 뾰족한 물체가 튀어나오는 다소 잔인한 장치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때도 마찬가지로 새끼 원숭이는 피를 흘리면서도 천 모형 어미를 떠나지 못했다. 접촉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졌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새끼 원숭이는 철사 모형 어미(왼쪽)보다 천으로 만든 어미 모형(오른쪽)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American Psychologist
새끼 원숭이는 철사 모형 어미(왼쪽)보다 천으로 만든 어미 모형(오른쪽)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American Psychologist

이런 특성은 성인이 되어서도 그대로 남아 있다. 불안과 슬픔을 느끼거나 우울한 상태에서 부드러운 촉각을 경험하면 마음이 안정되고 기분이 좋아지게 되는 것이다. 반면 아무 위협도 없고 기분이 좋은 상황에서는 포근한 촉각이 주는 위로 효과가 떨어진다. 오히려 이때 우리 뇌는 환경을 탐험하며 활력을 주는 시각적 자극을 찾는 것을 더 선호한다.

위협이 있을 땐 촉감에 민감해져 안정을 추구하고, 위협이 사라지면 시각 자극에 더 예민해져 주변을 탐험하고 싶어지는 일종의 균형 시스템으로 발전한 셈이다.

● 촉각의 위로…어른을 위한 인형 개발

촉각이나 신체 접촉 관련 연구 상당수는 아동 발달에 관심을 뒀다. 사회가 점차 각박해지고 개인의 외로움, 우울증, 자살, 고령화 같은 현대 사회 문제가 불거지면서 연구자들은 어떻게 하면 성인도 촉각을 활용해 심리적 안정 효과를 얻을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특히 세계 각국에서는 불안과 우울감을 해소하고 안정감을 주는 특수 인형 개발에 힘쓰고 있다. 영국 브리스틀대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 공동 연구팀은 특수 제작된 숨 쉬는 쿠션을 개발해 성능을 검증했다.

처음부터 숨 쉬는 쿠션을 개발한 것은 아니었다. 심장 박동이 느껴지는 쿠션, 자고 있는 고양이처럼 ‘푸르르르’하며 진동을 내는 쿠션, ‘푸르르르’ 떨림과 숨 쉬는 움직임이 같이 나타나는 쿠션, 무지개 조명이 나오는 쿠션 등도 후보군이었다. 사전 실험을 진행해 보니 이 가운데 사람들에게 가장 반응이 좋은 게 숨 쉬는 쿠션이었다.

이어진 실험에서는 실험참가자 129명에게 불안과 스트레스를 조장하기 위해 수학 시험을 보겠다고 공지했다. 시험은 필기도구로 종이에 푸는 게 아니라, 남들 앞에서 화면에 뜬 문제를 보고 정해진 시간 내에 구두로 설명하는 압박 방식으로 이뤄졌다.

연구에서 실제로 사용된 숨 쉬는 쿠션. 겉은 포근한 재질의 천으로 만들었고 내부에는 호흡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동력 장치가 들어 있다. 사진 출처 PLOS ONE

실험참가자를 세 그룹으로 나누고 시험을 치르기 전에 어떻게 하면 불안을 낮출 수 있는지 알아봤다. 첫 번째 그룹은 쿠션을 꼭 껴안고 있으라고 했다. 이 쿠션은 부드러운 재질의 하늘색 천으로 만들었고, 안에 동력 장치를 넣어 마치 쿠션이 숨 쉬는 것 같은 움직임이 느껴지도록 했다. 두 번째 그룹은 명상 전문가가 녹음한 명상법을 따라했다. 세 번째 그룹은 혼자 편안하게 휴식을 취했다. 수학 시험을 보기 전후로 심리 검사를 통해 각각 불안 수준을 측정했다.

심리 검사 점수를 분석해 보니, 쿠션을 껴안고 있던 사람들은 전문가 지도에 따라 명상을 한 사람만큼이나 시험 전 불안이 감소했다. 실제로 사람들은 쿠션 덕에 ‘진정됐다’ ‘편안했다’ ‘위안을 얻었다’ 같은 반응을 보였다. 연구진은 “긴장한 참가자들이 쿠션 움직임에 따라 호흡 속도가 느려지고, 부드러운 촉감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얻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 사람과 소통하며 촉각 자극하면 더 큰 안정감

부드럽고 폭신한 인형은 혼자 사는 노인의 우울감이나 외로움을 더는 효과도 있다. 일본 연구진은 스마트폰으로 통화할 때 상대방 음성에 맞춰 진동하는 인형 ‘허그비’를 개발했다. 60대 여성 18명 가운데 절반은 허그비를 껴안고 통화하도록 했고, 나머지 절반은 스피커폰으로 각각 15분씩 통화했다. 대화 상대는 연구진이 고용한 남자 대학생들이었다.

실험을 위해 오렌지색 ‘허그비’ 인형을 안고 있는 덴마크 노인들(위 사진)과 효과 비교를 위해 일반 스피커로 통화하는 노인들(아래 사진). 사진 출처 Frontiers in Psychology

통화 전후 노인들의 혈액과 타액을 채취해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를 살펴본 결과 허그비를 안고 있던 사람들은 다른 그룹보다 코르티솔 수치가 훨씬 더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일반 스피커 기능으로 통화한 노인들도 코르티솔 수치가 일부 감소했다. 사람과 상호 작용하며 즐거운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를 낮추는 효과가 있어서다. 이에 더해 연구진은 허그비가 부드러운 촉각에만 반응하는 인간 신경섬유인 C 섬유를 자극해 불안과 스트레스를 느끼는 뇌 편도체의 활성화 정도를 낮춘 것으로 분석했다.

덴마크 오르후스대에서도 60대 이상 남녀 참가자 29명을 대상으로 같은 실험을 해 봤더니, 허그비를 안고 통화한 사람들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스트레스와 불안 지수가 훨씬 더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허그비를 마치 어린 아이나 강아지, 펭귄같은 동물에 빗대어 설명하면서 사물이 아닌 인격체처럼 묘사하기도 했다. 다만 남성 노인들은 남자가 인형을 안고 있다는 것 자체를 다소 어색해 하기도 했다.

● 포근한 잠옷·소파로 포근한 환경 만들면 도움

촉각의 위로가 반드시 인형 같은 천 소재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댄 킹 싱가포르대 경영대학원 교수와 크리스 제니제프스키 미 플로리다대 경영대학원 교수가 시행한 연구에 따르면 로션을 바를 때의 부드러운 느낌도 기분이 별로인 소비자 정서를 환기하는 힘이 있었다. 로션의 부드러움 덕에 기분이 좋아진 소비자들은 로션을 사는 데 돈을 더 많이 지불할 의사가 있다고 했다. 폭신한 인형을 종류별로 사 모으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런데 연구진이 의도적으로 같은 로션에 물을 타서 로션을 바를 때 부드러운 느낌을 상쇄시키자, 소비자들은 이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로션을 사겠다는 의사를 철회했다.

이런 특성에 주목해 더 나은 기분을 느낄 수 있도록 휴식 공간을 꾸밀 수도 있다. 환경에서 느끼는 감각과 지각이 감정에 미치는 효과를 분석한 책 ‘조이풀’을 쓴 디자이너 잉그리드 페텔 리는 “어릴 적 애착 인형처럼 의미가 있는 물건이 아니더라도 어른 역시 힘들 때 위안을 얻을 수 있는 폭신하고 부드러운 질감의 소품을 통해 얼마든지 휴식 공간을 꾸밀 수 있다”고 강조했다.

힘든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와 무심코 만진 부드러운 소파, 쿠션, 무릎 담요 등이 건네는 위로가 생각보다 클 수 있다. 잠자리에 촉감 좋은 베개 또는 이불을 두거나 포근한 소재 잠옷을 입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반대로 이런 소품들은 회의실이나 작업공간, 교실처럼 지적 탐구 능력이 필요한 곳에서는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활력이 필요한 공간에는 안정감을 주는 부드러운 질감보다 화려한 패턴이나 색상을 활용해 시각을 자극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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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많은 댓글

  • 2025-02-02 00:58:21

    어렸을적 동아일보 때문에 겪은, 지금도 신문사가 너무 원망스러운 악몽이 있다. 1988년 5월 24일자 석간신문에 박정희대통령 시해범 김재규, 박선호, 김태원, 이기주, 유성옥 등의 처형장면을 내보낸 것이다. 엄청난 트라우마였다. 몇날을 잠못자고 떨다가 우연히 침대 구석 곰돌이 인형이 보였다. 꽉 껴안았다. 신기하게 공포심이 서서히 사라지더라. 또 그렇게 며칠밤을 곰인형과 함께 보내니 생활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물며 신뢰하고 사랑하는 가족을 안았을땐 오죽하랴. 옆에 막내딸은 지금도 나를 껴안지 않으면 무서워 못잔다, 사랑해 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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