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보기만 할 생각이었는데 겪고 있다”[후벼파는 한마디]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2월 1일 09시 00분


얼떨결에 화분 하나를 들였다. 옆자리 동료가 다른 부서로 자리를 옮기며 내게 남겨준 것이다. 본의 아닌 ‘식집사’ 노릇이 영 서툴러서일까. 처음 맡겨졌을 땐 다섯 개였던 잎이 자꾸만 하엽 지더니 이젠 두 잎만 간신히 남아 있다. 사무실에서 볕을 못 쬐어 그런가 싶어 창가 앞에도 내놔 보고, 화분 속 흙이 흠뻑 젖을 때까지 물도 줘봤지만, 남은 이파리마저 시들하다.

한 뼘도 안 되는 조그마한 화분이 왜 이리 신경 쓰이는지. 설 연휴가 끝나고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화분의 안부를 물었다. 화분을 돌보는 건 분명 나인데, 도리어 화분이 나를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왜 너만 물 마시고 나는 물 안 주냐고, 왜 너만 볕 쬐고 나는 사무실 속에 가둬놓냐고 따져 묻는 듯하다.

‘당근밭 걷기’ 책 표지. 문학동네 제공
‘당근밭 걷기’ 책 표지. 문학동네 제공


안희연 시인의 시집 ‘당근밭 걷기’(문학동네)에 수록된 ‘자귀’라는 시에는 한 식물(자귀나무)과 함께 1년을 건너온 시인의 경험이 담겨 있다. 시인에게 하나의 식물을 내 삶의 안쪽으로 들이는 일이란 “한 존재를 안다고 말하기까지/매일매일 건너왔고//건너왔다는 건 두 번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뜻”과 마찬가지다. 그렇게 자귀나무와 매일매일의 시간을 함께 건너온 시인은 자신이 이 식물을 돌보았듯, 식물 역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믿기에 이른다.

내가 볼 때
너도 보았겠지
‘자귀’ 중에서
서로를 지켜본다는 것은 단순히 본다는 것의 의미를 뛰어넘는다. 서로의 목격자가 되어 이 작은 생물의 생사에 나를 연루시키고, 나와 전혀 무관한 한 생명을 내 삶의 안쪽으로 끌어들이는 일이다. 이 시의 가장 마지막 연은 그래서 아프다.

멀리서 보기만 할 생각이었는데 겪고 있다
잎이 떨어지는 순간마다 귀가 아프다
‘자귀’ 중에서

무언가(혹은 누군가)를 오랜 시간 지켜본다는 것은 겨울마다 이파리가 떨어지는 것 같은 당연한 아픔조차 함께 겪는 일이기 때문이다.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서 펄롱(오른쪽)이 수녀원에서 한 소녀와 마주하고 있는 모습.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아일랜드 소설가 클레어 키건의 소설 원작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역시 아주 사소한 목격에서 비롯된다. 다섯 딸을 둔 가장 펄롱(킬리언 머피)은 석탄, 토탄, 무연탄, 분탄, 장작을 팔아 근근이 살아간다. 여느 때처럼 동네 수녀원에 석탄을 나르던 어느 날 펄롱은 수녀원 석탄 창고에 갇힌 한 소녀를 목격한다.

그 반대도 성립한다. 그가 소녀를 봤을 때 소녀도 그를 보았다. 수녀원으로부터 학대받은 흔적이 역력한 소녀와 마주친 그날 이후, 펄롱은 그 소녀도 나를 보았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이 컴컴한 창고에 나를 홀로 내버려둔 채 안온한 일상으로 돌아갈 거냐고 따져 묻는 것만 같은 시선이다. 가족들과 크리스마스 연휴를 보낼 때도 그는 마냥 행복하지 않다. 창고에 두고 온 그 소녀가 자꾸만 생각나서다.

외면할 수 없는 소녀의 시선이 그의 발길을 자꾸만 멈춰 세운다. 아내까지 더해 일곱 식구가 먹고살기도 빠듯한 형편이건만 그의 발걸음은 수녀원으로 향한다. 어두컴컴한 석탄 창고에 갇혀 추위와 굶주림에 떠는 소녀를 구출한다. 마침내 펄롱은 자신과 전혀 무관한 이 소녀를 자기 삶의 한가운데로 끌어들인다.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서 펄롱(왼쪽)이 수녀원 창고에 갇힌 소녀를 구출해 자기 집으로 데려가는 모습이다.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멀리서 보기만 할 생각이었는데, 함께 겪고 있다.” 이게 다, 외면할 수 없는 그 시선 때문이다. 아무래도 오늘 사무실에 놓은 화분을 집으로 가져와야겠다. 따뜻한 창가 자리에 화분을 놓고, 오래도록 볕을 쬐게 해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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