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2025년 신춘문예 당선자들. 뒷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류한월, 김준현, 윤주호, 장희수, 박진호, 나혜진, 정의정, 문은혜, 김민성. 동아일보DB
《2025년 을사년도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혹시 1월 1일 ‘책을 열심히 읽겠다’고 다짐하셨다가 작심삼일에 그친 분들이 계신가요. 2025년 국내 처음으로 100주년을 맞은 동아일보 신춘문예의 당선 작가들에게 당신의 ‘인생 책’은 무엇인지 물어봤습니다. 작가별로 나의 인생 책, 추천 사유, 책 속 한 문장을 정리했습니다. 설 연휴를 마무리하며 신춘문예 ‘백년둥이’ 작가들이 마음속에 간직한 책들을 펼쳐 보면 어떨까요.》
김준현 / 중편소설 당선자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한강 지음·열림원
이 에세이집을 처음 읽은 건 열일곱 살 때였다. 농도 짙은 먹빛으로 충만한 작가의 첫 장편소설 ‘검은 사슴’을 읽은 직후였다.
만 스물여덟 살의 작가가 미국 아이오와에서 만난 다국적 작가들의 이름을 소제목으로 쓴 책이다. 삼 개월 남짓한 시간 동안 베트남, 아르헨티나, 팔레스타인, 튀르키예 등지에서 온 작가들과 함께했던 순간을 작가는 기억하려고 한다. 기록하는 사람이 아닌 기억하는 사람이라고 되뇔 때의 울림이 오래 남았다. 흐르는 시간과 함께 속수무책으로 흘러가는 게 아니라 잠시 멈춰 설 수 있는 사람. 지면이 아니라 내면에 먼저 지나가 버릴 모든 순간을 남기고자 하는 사람. 십 년 전 연희문학창작촌에 입주했던 시절 새벽이 깊도록 불 켜진 작가들의 방 창문을 보며 우리는 ‘쓰는 공동체’라는 유대감을 느꼈다. 그건 손을 잡거나 함께 무언가를 도모하지 않아도 연결돼 있다는 느낌이다. 얇고 가벼운 문고본의 모습으로 단정하고 담백한 시선으로 이국의 작가들이 살아온 삶의 수많은 궤적을 책은 기억하고 있다.
● 책 속 한 문장 “나는 기억하는 사람, 모두가 잊은 것들을 기억하는 사람, 내가 기억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을 때까지, 다만 그때까지.”
박진호 / 단편소설 당선자
◇열한 계단/채사장 지음·웨일북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던 서른 살엔 세상에 있는 모든 ‘기성의 것들’이 나를 공격한다고 생각했다. 계급과 시스템, 성평등, 다양성 등등. 돈을 버는 사회인으로 마주하는 현실 문제는 학생 신분으로 손쉽게 외쳤던 이상과는 괴리가 너무 컸다. 그렇다고 뭔가 대단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니었다. 속으로만 그 불합리함에 분노하고 삭일 뿐이었다. 좀 우습게 들릴 수 있겠지만 그때는 출근하는 매일이 굴욕적이고 절망적이었다. 오랜 시간 천착했던 고민들이 사실은 세상 물정 모르는 이십 대의 치기였다는 걸 인정하게 될까 봐. 그러다 만난 책이 채사장의 에세이 ‘열한 계단’이다. 이 책으로 위로를 받은 한편 슬픈 마음이 들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인생의 중요한 시절을 건너버린 기분이었다. 지금도 내가 너무 멀리 와 버린 건 아닌지 씁쓸한 의심이 들 때면 정신적으로 불안했던, 그리고 가장 치열했던 서른 살의 일기와 이 책을 펼쳐 보곤 한다.
● 책 속 한 문장 “세상에 대한 우월감을 갖고 자신이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가져야 하는 시기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험은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며 세상과 대결할 때 그 힘을 비축하게 하고, 세상에 무릎 꿇게 되었을 때에는 다시 일어서게 하는 자존감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장희수 / 시 당선자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마쓰이에 마사시 지음·김춘미 옮김·비채
이전까지 소설은 흥미진진한 갈등이 해소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를 준다고 생각했다. 그런 편견을 깨준 신비로운 책이다. 시종일관 잔잔하다. 그럼에도 읽다 보면 차분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얼마나 진지하고 치열하게 고민하는지, 그 속마음을 엿보게 하는 매력이 있다.
무라이 슌스케 설계사무소 직원들이 도서관 설계 공모를 위해 산속 별장에서 합숙하는 이야기다. 주인공은 수습 건축가이고, 그의 스승은 과묵하다. 그 탓에 주인공은 스승의 건축을 배우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 고민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건축은 예술이 아니라, 삶 그 자체”라며 마치 ‘츤데레’처럼 툭툭 내놓는 스승의 말을 읽으면 괜한 긴장감까지 느껴진다. 도드라지는 갈등이 없어도 흘러가는 이야기를 읽자니 어딘가 위로가 되기도 한다. 우리 삶이 별일 없어 보인대도 각자는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일 테니.
● 책 속 한 문장 “공사하는 사람들은 무라이 슌스케의 이러한 디테일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면서 손을 움직였을까. 그들의 생각은 끝내 알려지지 않는다 해도, 한 일은 이렇게 남는다. 선생님의 설계는 시공자의 긍지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류한월 / 시조 당선자
◇모래의 여자/아베 코보 지음·김난주 옮김·민음사
어느 날 나는 한 권의 책 속에 빠져 모래 구덩이 아래로, 아래로 한없이 내려갔다. 그곳엔 햇볕 한 줌 들지 않았고 바람조차 메말라 고요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여전히 나였지만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나는 아니었다.
이 책은 곤충 채집을 위해 황량한 땅으로 떠난 한 남자가 모래 구덩이 속 마을에 갇히면서 벌어지는 기묘하고도 묵직한 이야기를 펼쳐 보이는 소설이다. 기이한 설정 속에 인간 실존의 불안, 억압과 자유, 균질화된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이 흠뻑 담겨 있다.
타인의 빛나는 개성은 회색 종족에게 자신의 결핍, 즉 무채색의 단조로운 삶을 비추는 잔인한 거울이다. 소설은 자신의 고유한 색을 찾기보다 회색에 섞여 안주하려는 이들에게 진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도록 촉구한다.
소설은 1964년 테시가하라 히로시 감독에 의해 영화화됐는데 원작자인 작가가 직접 각본을 담당했다. 흑백 영상 속 끝없이 펼쳐지는 모래 언덕과 그 질감이 원작 못지않은 감동을 준다.
● 책 속 한 문장 “회색 종족은 자기 이외의 인간이, 빨강이든 파랑이든 초록이든, 회색 이외의 색을 지녔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 없는 자기혐오에 빠진다.”
윤주호 / 희곡 당선자
◇파수꾼/이강백 지음·지만지드라마
좋은 희곡은 등장인물 수만큼 다른 이야기를 숨기고 있고 그래서 읽을 때마다 다르게 읽힌다고 배웠다. 이강백 선생님의 ‘파수꾼’을 다시 읽었다. 베테랑 파수꾼인 ‘나’는 수습 파수꾼인 ‘다’를 반기며 “넌 아직 채워지지 않은 내 꿈, 나를 애태우는 갈증이란다. 이 황야의 한복판에서 난 너라는 꿈을 꾼다”라고 말한다. 이전에 읽었을 때는 이 말이 파수꾼 ‘나’의 자부심으로 들렸는데 이번에는 그의 두려움으로 들렸다. 파수꾼 ‘나’는 자신의 눈으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적을 존재의 의미로 삼으며 평생을 황야에서 홀로 살았다. 그런 ‘나’의 채워지지 않던 꿈, 애태우던 갈증, 혼자서 꾼 꿈은 무엇일까. 오늘 처음 본 ‘다’가 자신이 평생을 기다려 온 바로 그 사람이라고 생각한 그 확신은 어디서 온 걸까. 그 말을 들었을 때 ‘다’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작가는 “우화적인 희곡의 장점은 어떤 시간에 어떤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 읽어도 언제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10년 뒤에 다시 이 책을 읽으면 그때의 나는 어떤 이야기를 발견하게 될까. 파수꾼 ‘나’가 황야에서 홀로 꾼 꿈을 그때는 어떤 마음으로 읽게 될 것인가.
● 책 속 한 문장 “넌 아직 채워지지 않은 내 꿈, 나를 애태우는 갈증이란다. 이 황야의 한복판에서 난 너라는 꿈을 꾼다.”
나혜진 / 동화 당선자
◇파피용/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백선희 옮김·열린책들
‘개미’를 통해 알게 되고 ‘파피용’을 접한 뒤 사랑하게 됐으며 ‘고양이’로 나의 시선을 한 번 더 끌어 끝없이 바라보게 만드는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기발한 상상력을 통하여 인간 사회를 보여주는 작가는 ‘파피용’에서도 적나라한 인간 사회를 보여 줬다. 책은 지구에 더 이상 살기 어려워지자 우주로 나가기 위한 나비 모양 우주선을 만들고 그것을 타고 떠나는 이야기다. 제목은 우주선의 이름. 주인공들은 파피용에서 1000년 동안 여행하게 되는데 그 속에서도 하나의 인간 사회가 만들어지며 여성 한 명, 남성 다섯 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자멸한다. 도착한 행성에서 여러 일이 있고 난 뒤 유일하게 남은 남녀 한 쌍은 “영원히 탈출을 계속할 수는 없으니까”라고 말한다.
인간들이 지구를 망가뜨려 그것을 해결하지 못해 탈출했고, 파피용 안에서도 인간들은 욕망을 좇다 망가졌다. 일을 벌여 망가뜨리기만 하고 책임지지 못하는 인간 사회에 대해 한마디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본인의 선택에 대한 회피와 도망만으로는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작게는 개인의 선택에, 크게는 지구의 환경과 인간 사회에 대한 선택으로부터 영원히 탈출을 계속할 수는 없다.
● 책 속 한 문장 “영원히 탈출을 계속할 수는 없으니까.”
김민성 / 시나리오 당선자
◇유혹하는 글쓰기/스티븐 킹 지음·김진준 옮김·김영사
‘쇼생크 탈출’과 ‘미저리’로 유명한 저자가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작가로서 성공하기까지 과정 그리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교통사고 이야기까지 파란만장한 삶의 여러 장면을 전하는 에세이에 가깝다. 스토리텔링 작법이나 기술적인 문장 스킬보다 글쓰기의 진수를 전한다.
작가로서 그의 철학과 인생관이 잘 녹아 있는 책이다. 글쓰기가 정체된 작가뿐만 아니라 새로 글을 쓰고 싶은 이들이나 킹의 작품들을 좋아하는 모든 독자에게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의 삶을 엿보는 쏠쏠한 재미를 준다. 독자뿐 아니라 작가들 사이에서도 필독서로 통한다.
저자와 나에게 유일한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힘겨운 글쓰기 여정을 묵묵히 지지해 준 아내의 존재다. 아직도 나는 아내의 굳건한 믿음이 필요한 미완의 작가다. 하지만 언젠가는 나도 킹처럼 당당히 말하고 싶다. “이 작품을 나의 아내에게 바칩니다!” 그날을 향한 나의 글쓰기 여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 책 속 한 문장 “글쓰기는 외로운 작업이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정의정 / 문학평론 당선자
◇랭스로 되돌아가다/디디에 에리봉 지음·이상길 옮김·문학과지성사
푸코 평전 등을 펴내고 성소수자의 정체성 문제를 탐구해 온 프랑스 사회학자 디디에 에리봉의 회고록. 동성애자이자 지식인으로서 새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동자 계급의 가족을 떠났던 저자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자신과 가족의 과거를 탐사해 나가는 여정을 떠난다. 저자는 고향 랭스로 가서 계급적, 성적, 지적 정체성들이 충돌하고 교차하는 상황을 응시한다. 저자의 자기 탐구는 내가 무엇에도 집중하기 어려운 시절, 유일하게 집중할 수 있게 했던 주제다. 졸업 논문을 쓰며 전세 대출도 받아야 했다. 은행에서 대출을 거절당할 때마다 내 처지는 ‘공부하는 학생’이라는 수식어가 사라진 ‘무소득자’로 정리됐다. 아버지는 예순이 넘어서도 건설 현장에서 노동을 했다. 어머니는 늘 실업 위기 속에 있었다. 나는 우리 부모 세대보다 무언가 나아져야만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문학 세미나에서는 노동에 대해 말하지만 나는 노동자 계급과는 아무 상관 없는 것처럼 말하곤 한다. ‘퀴어한 엘리트’가 되는 것에는 거리낌이 없으면서도 마치 노동에 대해서는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처럼 군다. 나는 뭘까? 이때 읽은 책이다.
● 책 속 한 문장 “내겐 ‘불평등’이라는 말조차, 착취라는 적나라한 폭력의 실상을 현실감 없게 만드는 완곡어법처럼 비친다.”
문은혜 / 영화평론 당선자
◇프랑켄슈타인/메리 셸리 지음·김선형 옮김·문학동네
소설이 주는 통찰은 2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 각자가 괴담을 쓰는 겁니다”라는 바이런의 제안으로 네 명이 글을 쓰기 시작하고, 열아홉의 나이로 메리 셸리는 공상과학소설인 프랑켄슈타인을 완성한다. 공상과학소설 장르는 단순히 공상적이고 환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합리적 상상력과 알레고리를 통해 현실의 모순을 인식하도록 하는 미학적 장르로 진리의 파편을 드러낸다.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괴물은 이상만 추구하던 무책임한 과학의 산물이다. 주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버려진 괴물, 사랑을 갈구한 아담으로서 무모한 과학실험이 불러온 재앙을 경고한다. 생명복제 기술이 사회적 합의보다 훨씬 앞선 오늘날 사회에서 생명에 관한 책임은 어떠해야 하는지, 교육과 양육이 개인의 도덕 발달에 미치는 영향, 이질감이 주는 혐오와 편견 등에 관하여 생각할 거리를 많이 준다.
● 책 속 한 문장 “제발 프랑켄슈타인, 다른 사람한테는 잘해주면서 나만 짓밟지 말아 주시오. 나는 당신의 정의를, 당신의 너그러움과 애정을 받아야 마땅하오. 나는 당신의 피조물이잖소.”
댓글 1
추천 많은 댓글
2025-02-02 18:35:44
류한월씨, 물에 자신의 모습을 왜곡없이 비춰보기 위해서는 물은 어떤 색깔에도 물들지 않고 투명하고 깨끗해야 합니다. (앙굿따라 니까야)라는 경에 있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