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훈·정경준·천광암 기자] 충남의 생활도자기 업체인 삼한세라믹은 지금 경매에 부쳐져 사실상 폐업상태다. 다음은 崔正洙(최정수)사장이 말하는 전말.
『거래하던 유통업체 2곳이 최근 부도를 냈다. 이들 업체로부터 받아 할인한 어음 1억여원을 대신 결제해야 할 처지에 몰렸다. 거래은행인 I은행측은 처음엔 「어음만기일인 3개월뒤까지 천천히 갚으라」고 했다. 그런데 열흘뒤 어찌된 영문인지 내가 보증을 서준 기업을 갑자기 압류했다. 그러자 우리 회사 부도설이 퍼졌다. 몰려온 납품업체들에 1억원어치의 재고를 빼앗기는 소동끝에 결국 공장 문을 닫지 않을 수 없었다』
은행으로서는 금강 물에 조약돌 하나 던지는 정도의 사소한 일인지 몰라도 멀쩡하던 중소기업 하나가 이렇게 쓰러졌다. 최사장은 이 은행에 7천만원의 적금도 들고있었다. 「대출책임자가 정년을 앞두고 있어서 지나치게 몸조심한 것」이라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다고 최사장은 말했다.
이번엔 에너지 관련업체인 D사 자금과장의 얘기.
『얼마전 거래은행으로부터 받은 공문 한장 때문에 요즘 잠이 안옵니다. 중소기업에 대한 총액 대출한도가 줄었기 때문에 상업어음 할인금리를 1.25%포인트 올리겠다는 겁니다. 신문에는 지급준비율 인하로 은행들이 대출금리를 내렸다는 기사들이 가득한데 그건 어느 나라 얘깁니까』
전남 광양에 있는 중소전기업체 H사. 한보철강에 전기공사를 해주고 어음을 받았다. 한보 부도로 연쇄부도 위기에 몰렸으나 정부와 채권금융기관의 자금지원 발표에 한 시름을 덜었다.
▼ “풀린돈 다 어디갔나” ▼
지난달말 한보철강 자금관리단으로부터 11억원에 해당하는 진성어음 확인서를 받아들고 은행에 찾아갔다. 그러나 여지없이 퇴짜를 맞았다. 『부도가 날지도 모르는 회사에 대출해줄 수 없다』는 퉁명스런 반응. 한술 더 떠서 『이미 할인한 어음 8억원에 대한 담보를 내놓으라』는 독촉까지 받았다. 부도 직전의 피말리는 나날이 이어졌다.
「한보사태후 금융당국이 풀었다는 5조5천억원은 어디로 갔을까」. 이 회사 자금과장 A씨에겐 풀리지않는 의문이다. 기업들이 매일같이 맞닥뜨리는 금융현장은 이렇듯 딴 세상이다.
금융산업은 국민경제가 원활히 돌아가도록 피(자금)를 공급한다. 그러나 지금 산업 곳곳에는 피가 모자란다. 어느 재벌총수는 작년말 한 공식행사에서 이런 말을 했다.
『10년전에는 은행의 능력으로 대기업그룹의 필요자금을 뒷받침하는데 0(단위) 하나가 모자랐지만 지금은 두개가 모자랍니다』
해가 다르게 커가는 산업을 은행이 「지원」한다고 하지만 겨우 1백분의 1 수준밖에 안된다는 얘기다.
금융서비스 수요자인 기업들은 무엇보다도 「고래심줄」처럼 변할 줄 모르는 금융관행에 더 강한 불만을 터뜨린다.
▼ 사업계획 못들은척 ▼
『우리 회사는 대부분의 거래를 외국계 은행 국내지점과 하고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부분만 국내 은행을 찾지요. 외국 은행과의 거래는 예외없이 신용거래지만 국내 은행에서 담보없이 돈을 빌린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외국합작회사 D사 자금관계자)
금리가 똑같다고 해도 담보설정에 필요한 비용을 감안하면 국내 은행의 금리가 훨씬 비싸다. 국내 은행들의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95년말 기준으로 세계 1백대 은행에 든 국내 은행은 하나도 없다. 반도체 조선 철강 등 세계 5위내의 업종이 여럿인 제조업과 비교된다.
『미국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게 된데는 시장기능을 제대로 발휘한 금융부문의 역할이 컸습니다. 미국 금융기관은 철저한 기업평가를 통해 성장기업에 대해서는 충분히 자금을 조달해줬지요. 그것이 창조적인 기업을 길러내고 곧 미국첨단제품이 세계시장을 누비게된 힘이 됐습니다』(홍익대 李光哲·이광철교수)
우리 사정은 어떤가. 장외등록을 앞둔 서울소재 벤처기업 K사 관리부장(37)의 얘기.
『벤처기업은 기술력 하나로 창업한 회사인데 은행들은 기술내용과 사업계획을 아무리 설명해도 들은 체도 안합니다. 오로지 담보만 갖고오라는 거예요. 어렵사리 안정단계에 접어드니까 은행들이 뒤늦게 거래를 트자고 몰려오더군요』
▼ 국민 경제 주름살만 ▼
그러나 한보처럼 장래가 불투명한 기업에는 5조원의 돈이 흘러들어갔고 부실채권이 돼 은행은 물론 국민경제에 주름살을 준다.
『국내 은행들의 부실은 과다한 부실채권과 주식평가손 때문입니다. 지나치게 비대한 조직과 인건비 부담, 그리고 저생산성이 은행 저효율성의 주요인입니다』(한양대 姜柄晧·강병호교수)
물론 은행 쪽도 할말은 있다.
『정부당국과 정치권으로부터 은행이 자유로운 적이 언제 있었습니까. 또 고금리에는 기업측 요인도 있어요. 부채비율이 높은데도 설비투자를 그렇게 해대니 자금수요가 공급을 초과해 고금리가 될 수밖에요』(S은행 대출담당임원)
그러나 지금 이 시간에도 많은 중소기업인들은 고개를 떨군채 은행문을 나서고 있다. 기업을 일구려는 열기에 불타는 중소기업인들이 금융의 진정한 협력과 지원을 기대할 수 있는 시대는 언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