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며 생각하며]안유수/기업인으로 찾은 北의 고향

  • 입력 1997년 7월 3일 20시 14분


지난달초 침대 합작공장 건설을 위해 약 1주일간(3∼10일) 북한을 다녀왔다. 사리원 고급중학교 1학년때 전쟁이 터져 「서울역 시계탑에서 일주일후에 만나자」는 약속과 함께 목탄열차를 탄 것이 부모형제들과의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말았다. ▼ 47년만의 혈육상봉 ▼ 그로부터 47년만에 고향땅을 밟았다. 그동안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집념을 갖고 노력한 결과 휴전선과 가까운 고향땅에 침대 합작공장을 세우기로 합의했다. 개인적으로는 비록 유명을 달리하셨지만 부모님의 산소 성묘도 하고 생존해있는 가족(누님 두분, 조카들)도 만나 근 반세기동안 맺혔던 가슴속의 응어리를 풀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직도 이산의 아픔을 씻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실향민들에게는 미안하다는 생각이 가슴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다. 아마도 이산가족들만이 느낄 수 있는 동병상련일 것이다. 그러나 짧았던 북녘 혈육들과의 상봉때 느꼈던 그들의 모습이 또다른 아픔으로 떠올라 심한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고향 사리원 침대합작공장 건설사업을 추진한 작년 이후로는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밤잠도 수없이 설쳤다. 돌이켜 보면 나의 삶은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전쟁통에 가족과 헤어져 매일 서울역 시계탑에 나가 부모 형제를 기다리다 중공군이 밀고 내려오면서 단신으로 부산 피란길에 올랐다. 어린나이의 피란살이는 처절했다. 부두 노동자 야채 군납업을 하면서도 주경야독으로 대학을 마쳤다. 고생의 연속인 삶이었지만 부모님들은 항상 내가슴에 신앙처럼 틀고 앉았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어도 기쁜 일이 생기면 「아버님 어머님 제가 이렇게 성공했습니다」며 마음속으로 보고를 드리곤 했다.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였다. 2년전 중국 광동성(廣東省)에 현지공장을 설립하고 나서 조선족 등을 통해 고향의 부모형제를 수소문해 사리원에 사는 누님이 보관해온 부모사진을 어렵게 구했다. 귀퉁이가 찢겨나가고 빛은 바랬지만 바로 어렸을 때 안방 아랫목 벽에 걸렸던 가족사진이었다. 아버지는 65년, 어머니는 76년에 세상을 떴다는 소식도 이때 전해들었다. 이번 방북때 북한측에서 다른 곳에 묻혔던 아버님의 산소를 어머니가 계신 사리원으로 옮겨 합장해주었다. 요새 매스컴에는 연일 정치얘기로 날이 새고 지는 것 같다. 경제는 극도로 나빠져 유수한 기업들이 수없이 도산했고 또 다른 기업들이 도산의 공포에 떨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왜 우리 국민은 정치의 족쇄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 경제교류 더 힘써야 ▼ 동남아나 중국에 가보면 관리들이 공항까지 나와 한국 기업인들을 영접하고 공장유치를 위해 온갖 편의제공을 하고 있다. 북한도 결국은 개방의 시대적 물결을 언제까지나 거스를 수는 없을 것이란 생각이 방문기간 내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지금은 불과 손가락을 꼽을 정도의 기업이 북측과 합영사업을 하고 있지만 노력과 인내를 가지고 접촉하다보면 좋은 결과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도 가질 수 있었다. 당국은 당국대로 북한측의 변화에 다각적으로 대응하면서 국내기업을 통해 반세기동안 굳게 닫힌 문을 두드리면 반드시 열릴 것으로 확신한다. 이 길만이 1천만 이산가족의 갈라진 혈육을 이어줄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이루어진 홍콩반환은 분단된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너무나 큰 것 같다. 바야흐로 이데올로기 시대는 가고 경제전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공존하는 일국양제(一國兩制)의 중국을 보면서 국민 정치인 경제인 모두가 다시 한번 깨어났으면 한다. 안유수(에이스침대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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