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은행 융자부 김모과장이 대출심사를 위해 B기업의 지방 사업장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이 회사 서울 본사 직원과 함께 공장 안을 둘러보다가 한 생산직 사원이 혼자말로 내뱉는 푸념을 우연히 듣게 됐다.
『저 친구 되게 웃겨, 언제 날 봤다고 아는 척하고 야단이야. 기껏해야 일년에 한번 내려올까 말까 하면서』
김과장과 동행한 본사 직원을 겨냥한 비아냥이었다. 직원끼리, 근로자와 사장 사이에 불화의 골이 깊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회사 박모사장은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회사의 사업계획 보따리를 풀어헤쳤다. 사업성이 좋아 2년이면 투자비용은 건져내고 3년째부터는 알토란 같은 수익이 떨어질 것이라는 얘기.설명 도중 그는 『큰 오더 하나 받게 되면 김과장네 점포의 수신고는 우리가 책임지고 올려주겠다』는 말을 양념처럼 되풀이했다.
막판에는 은근한 미소를 흘리면서 「한달에 한차례 골프 부킹」을 약속했다.
김과장은 사업계획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사업성을 밝게 보는 근거는 무엇이냐, 사업 단계별로 구체적인 자금조달 계획이 분명하지 않다. 현금 흐름표를 보면 수입보다 지출이 많은데 운전자금 조달에 어려움이 없느냐』
박사장의 얼굴에 진땀이 흘렀다. 『아, 그것은 오더 한 건만 잡으면 다 해결돼요. 운전자금은 급하면 제2금융권에서 조달하면 되구요. 우리 한번 잘해 봅시다』
김과장은 박사장이 건네는 두손을 뿌리쳤다. B기업과의 대출건은 없던 일이 돼버렸다.
올 들어 굴지의 기업들이 「공룡이 빙하기를 만난 것처럼」 무더기로 쓰러지면서 은행 융자부 직원들의 눈초리는 비수를 품은 듯 날카로워지고 발바닥은 잰 걸음으로 퉁퉁 부르텄다.
기울어가는 회사를 살려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중소기업 사장님」의 사정도 딱하지만 남의 사정을 봐줄 때가 아니다. 거래처가 부도나면 담당 직원이 떼인 돈을 책임지고 메워야 한다. 한번 찍히면 승진도 어렵다.
『요즘은 자나깨나 부도 걱정입니다. 혹시 밤 사이에 내가 맡은 업체가 쓰러지지는 않았는지 출근하자마자 거래처 자금담당자에게 「안부전화」부터 겁니다』(C은행 화양동지점 차장)
경기가 잘 풀릴 때는 융자담당이 인기였지만 웬걸, 요즘과 같은 불경기에는 「기피 1호」 업무로 전락했다.처음부터 돈 떼일 걱정을 하다보니 신규업체를 발굴하는 것은 엄두도 나지 않는다.
D은행 도화동지점 신모과장은 『지난 3년간 기업대출을 맡으면서 점쟁이가 된 기분』이라고 털어놨다.
은행원이 점쟁이라니. 그의 얘기는 이렇다. 대출신청서를 들고 은행을 찾아온 「사장님」을 처음 마주할 때면 으레 얼굴부터 뚫어지게 쳐다본다. 목적은 오직 하나. 「이 사람한테 돈을 빌려주면 한푼도 안떼이고 되돌려받을 수 있을까」. 관상을 보는 나름대로의 노하우도 있단다.
우선 말을 많이 하도록 유도한다. 어떤 방식으로 부하직원을 다루는지, 이런 사업을 하게 된 계기는, 취미는, 골프는 치는지….이렇게 연신 묻다보면 상대방의 성격과 사업가로서의 성취욕, 성실성 등을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신과장은 『관상을 보면 「이 사람은 된다 안된다」고 대충 맞힐 자신이 있다』며 웃었다.
옥석(玉石)을 고르는데는 사채업자도 동원된다.F은행 안산지점 조모차장은 『이 지역 사채업자들과 수시로 기업정보를 주고 받는데 이들이 OK하면(어음을 할인해주면) 일단 적격업체 리스트에 올려놓는다』고 귀띔한다.
그런데 관상과 사채업자가 대출업체 선정의 잣대가 된다면 도대체 금융기관이 일을 제대로 하는 건지 의심이 간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분식결산이 다반사로 자행되는데 기업이 제시하는 재무제표를 믿을 수 있겠어요』(G은행 P심사부장)
그는 요즘 같은 불황기에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지표는 「현금흐름표」와 「경영자의 마인드」라고 잘라 말한다.
『적정 현금자산을 사내에 유보할 정도의 건전한 현금흐름이 보장되고 회사를 위해 온몸을 던지는 경영자가 사장으로 있는 회사라면 믿을 만합니다』
〈이강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