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에세이/21세기 앞에서]기업용어의 개발

  • 입력 1997년 8월 21일 20시 32분


나는 평소에 임직원들에게 조직내에서 사용되는 용어를 가급적 통일시켜 나가고 조직의 철학과 가치관이 함축돼 있는 독특한 용어를 개발해 나갈 것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조직내 언어인 용어는 경영활동의 실행수단이 될 뿐 아니라 바로 그 조직의 질적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 조직의 질적수준 가늠 ▼ 내 자신도 신경영을 추진하면서 종업원이 신경영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와 예화 중심의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내느라 많은 고심을 했다. 한가지 예로 신경영에서 강조한 「변화」는 결코 중단될 수 없다는 취지에서 보잉 747기의 이륙과정을 비유로 설명한 것을 들 수 있다. 보잉 747기가 일단 활주로를 달려 공중으로 뜨게 되면 불과 몇분 안에 1만m까지 올라가야 되는데, 만약 이 시간 안에 올라가지 못하거나 중간에서 멈추게 되면 추락하거나 공중폭발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삼성의 신경영도 한번 시작한 이상 방향을 바꿀 수도, 속도를 늦출 수도, 다시 내려 올 수도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조직내 용어는 통일시키는 것이 좋다. 이것은 개성을 무시하는 획일화와는 다른 차원이다. 용어를 통일시키면 서로 뜻이 이심전심으로 통하게 돼 의사소통에 드는 비용과 시간을 줄이고 오해를 막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조직의 비전과 경영방침에 대한 공감대를 쉽게 형성해 나갈 수 있다. 용어는 또한 시대변화를 리드하고, 때로는 한 사회나 조직의 철학을 대변하기도 한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삼성이 하청업체가 아닌 협력업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중소기업의 중요성을 조직내에 널리 인식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 나이 많은 사람을 노인층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실버층으로 부르는 것이 훨씬 멋지고 낭만적으로 들린다. 실버층이라는 용어는 단순히 물리적으로 나이를 먹었다는 것을 넘어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경험한 노련미와 경륜에 대한 존경의 의미가 포함돼 있다고 할 수 있다. ▼ 「소비자」보다 「고객」 ▼ 상품을 써서 없앤다는 뜻을 지닌 소비자(Consumer)라는 표현이 점차 사라지고 고객(Customer)이란 용어가 일반화되는 것도 이제는 기업이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을 맞춤식으로 대응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고객만족의 대명사처럼 인식되는 월트디즈니에서는 독특한 자신만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들은 종업원들을 쇼의 출연진이라는 뜻의 「Cast Member」라고 칭함으로써 엔터테인먼트사업에 종사하는 종업원들에게 회사가 기대하는 바를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다. 또한 고객에 대해서는 집에 초대한 손님이라는 뜻의 「Guest」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뿐만 아니라 회사내에서는 이 단어가 문장 어디에 위치하건 반드시 대문자 G를 쓰도록 의무화함으로써 고객의 중요성을 조직내에 확산시키고 있다. 이 두가지 용어가 오늘날의 월트디즈니를 만들어 낸 비장의 무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기업도 이제 이러한 용어개발과 사용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자기기업의 용어 아이덴티티를 확립해 나가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것이 기업경영에 철학과 문화를 심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이건희(삼성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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