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그룹들이 잡다하게 벌여놓은 업종을 맞바꾸어 업종 전문화를 이루자는 논의가 한창이다. 이른바 ‘빅 딜’이다.
재벌그룹들이 전문 업종으로 무장하고 규모의 경제를 살린다면 국제시장에서 경쟁력을 회복하고 고용 안정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석유화학 자동차 반도체 조선 등 우리나라 대표적인 수출산업들의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빅 딜’의 가능성과 효과를 낙관하기 어렵다.
▼자동차〓국내에서 가장 경쟁력이 높은 업체는 현대자동차. 그러나 일본 도요타자동차보다 금융비용과 부채비율이 각각 17배, 8배나 높다. 1인당 매출과 순익도 각각 4분의1, 9분의1수준.
한국 완성차업체의 전체 생산능력은 내수 규모의 5∼6배. 내수 부진에 시장개방이 가속화하면 채산성이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다. 기존 생산시설을 한두 업체에 몰아줘 외국 대형 업체에 맞설 규모의 경제를 갖춰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견해다. 구체적으로 현대와 대우에 삼성 기아자동차 등 다른 업체를 통합시키자는 안이 설득력이 있다.
자동차 업계의 빅 딜이 이루어지면 신차 개발비용을 대폭 줄이거나 생산 차종을 탄력있게 조절할 수 있다.
▼석유화학〓국내 생산규모는 에틸렌 기준 연 4백29만t으로 세계 5위이지만 개별 기업 기준으로 세계 5위권에 든 한국 기업은 없다. 미국 독일 업체들은 일찌감치 다국적화를 시도, 시설능력을 크게 늘렸다.
한국 업체 대부분이 합성수지 등 유사한 범용(汎用)제품 생산에 매달려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 외국업체들이 80년대 후반부터 고부가가치 제품 쪽으로 활발히 구조조정을 해왔지만 한국 업체들은 기초기술 미비로 이 분야에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국내 최대업체인 LG화학 관계자는 “비슷한 제품을 생산하는 다른 업체 공장을 인수해도 경쟁력 향상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만 원료 분야가 강한 현대종합화학과 중간재 분야에 중점을 둔 삼성석유화학이 같은 단지(충남 대산)에 입주하고 있어 두 기업이 합친다면 효과가 클 것으로 예상된다.
▼반도체〓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삼성 현대 LG 반도체 3사의 경쟁력은 세계수준. 주력 16MD램의 가격이 폭락했지만 최근 64MD램 가격이 상승 조짐을 보여 수익성이 호전될 것으로 기대된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3사가 통합을 이루면 외국 업체가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최대 생산능력을 갖추고 경기변동에 맞춰 가동률을 조절하면 가격 급락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안정적인 수익을 바탕으로 비메모리 분야에 투자하면 미국 업체들의 아성에 도전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조선〓외형으로 놓고 보면 한국이 유일하게 세계 선두를 달리는 부분. 그러나 업계 선두인 현대조선 1인당 매출이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의 3분의1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효율이 낮다. LNG선 등 고부가가치선의 매출 비중이 낮기 때문.
조선업계에서는 빅 딜이 이루어지더라도 출혈 수주를 막는데는 효과적이지만 생산성을 높이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영이·박래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