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차례나 재정경제원과 청와대에 외환위기를 경고했다는 한국은행의 주장과 달리 한국은행 스스로도 환란(換亂)이 코앞에 닥친 작년 10월까지 위기 불감증에 빠져 있었다.
금융기관들의 외화조달 창구가 끊겨가고 환율이 급등한 작년 10월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위원들은 “최근 외환위기에 대한 한은의 대책을 밝히라”고 국정감사 자료를 요구했다. 한은은 국회에 제출한 감사자료에서 “미국 달러화에 대한 원화환율이 상승하는 등 어려움이 있으나 외환위기로 발전될 가능성은 없다”고 단정했다.
한은은 당시 환율을 방어하기 위해 하루 수억달러씩을 쓰면서도 “외환보유액이 2.6개월분의 수입액에 맞먹는 적정 수준으로 크게 우려할 수준이 아니다”라는 보고서를 냈다.
한은 관계자들은 “당시 청와대와 재경원에는 외환사정이 매우 긴박하다고 사실대로 알렸지만 국회에 사실대로 보고하면 내용이 공개돼 외환시장이 혼란상태에 빠질 우려가 있었다”고 변명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행의 처신을 보면 청와대와 재경원에 올린 보고서와 달리 외환위기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인식을 주기에 충분하다. 한국은행은 11월 14일 금융개혁법안 통과를 둘러싸고 재경원과 힘겨루기를 하면서 증권감독원 보험감독원과 함께 총파업에 돌입하겠다고 위협했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신청을 불과 일주일 앞둔 시점이었다.
당시 한은 실무자들은 “외환시장이 살얼음판같고 원화 금리까지 들먹이는 마당에 파업을 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비난여론에 대해 “금융시장의 요동은 한번 지나가고 말지만 금융개혁법은 한번 통과하면 수십년 동안 고칠 수 없다”는 기묘한 논리를 폈다.
금융관계자들은 “청와대와 재경원에 보고서 몇장 올린 것으로 모든 책임을 모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윤희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