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기관의 외환부문에 관한 한 누가 규제하고 챙겨야 할지가 불분명했다. 그런데도 ‘어떻게 되겠지’하는 방심이 결국 금융감독 부재상태를 낳고 말았다.”(한국은행 관계자)
‘한국호’의 항해사들은 폭풍우에 대처할 만한 비상시스템을 갖고 있었으며 위기경보는 제때 울렸는가. 금융감독당국인 재정경제원과 은행감독원 등은 어디서 뭘하고 있었는가.
▼과다여신 방치〓작년 1월 한보사태 때 국내 금융기관을 주시하던 외국금융기관들은 7월 기아사태때부터 종금사에 빚독촉을 본격화했다. 기아에만 4천억∼5천억원을 대출한 종금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
종금사의 동일계열 여신한도는 자기자본의 150%. 언뜻 보기엔 과다여신을 막는 장치로 보이지만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이 한도를 지킨 종금사라도 거래기업이 쓰러지면 함께 쓰러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을 꿔준 종금사에 대해 아무 제재가 없었던 것.
외국의 빚독촉 충격은 은행에도 번졌다. 산업은행마저 해외차입이 막히자 한국은행이 나섰지만 허탕이었다. 결국 국제통화기금(IMF)을 찾아가야 했다.
▼미스매치도 안챙겨〓단기로 외화를 꾸어다가 장기자금으로 국내기업에 꾸어준 이른바 ‘미스매치(차입과 대출의 기간불일치)’에 대한 재경원 관계자의 최근 설명은 이렇다.
“롤오버(채무연장)만 잘 된다면 단기차입이 이자가 싸기 때문에 나쁠 것이 없다. 지난해 상반기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롤오버가 되고 있었고 금융기관들이 단기차입을 빌려쓰는 것이 규정위반도 아니다.”
롤오버가 잘되지않는 비상상황에대한 예측을 전혀 하지 않았고 중간점검 시스템도 갖춰지지 않았음을 입증하고 있다.
재경원 관계자는 “종금사들이 하루짜리(오버나이트) 외자를 빌려다가 3년물로 운영하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다”며 “그러나 현행 감독체계로는 종금사들이 그런 내용을 보고할 의무가 없는데다 보고하라고 하면 당장 ‘관치금융’이라며 반발했다”고 말했다.
재경원이 미스매치를 해소하지 못한 8개 종금사에 대해 신규 외국환업무를 뒤늦게 중지시킨 것은 지난해 11월23일. 전문가들은 “재경원이 일찌감치 종금사의 신규 외환업무를 막았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고위험 투자 일삼아〓H종금의 모 이사는 “외국사람들이‘한국에는소로스킴, 소로스 리가 많다’고 말한다”고 전했다.
해외투자의 ABC는 현금으로 전환할 수 있는 정도(유동성)와 회수불가능 정도(위험성) 등을 감안, 투자자산을 분산하는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는 것. 이 기본을 무시한 국내 금융기관의 투자관행을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는 지난해초부터 들을 수 있었다.
재경원 관계자는 “한국 금융기관들이 JP모건에 사기를 당한 것으로도 보인다”고 말한다. JP모건이 주간사가 돼 동남아의 고수익고위험 금융상품을 판매했을 때 국내 금융기관들이 덥석 물었다가 최근 자금회수를 못하는 지경에 이르자 내뱉은 탄식이다. C은행은 최악의 경우 8천만달러를 대신 물어줘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금융기관을 상대로 ‘한 건’을 올린 죄(?)밖에 없는 JP모건을 원망하고 있는 감독당국은 무얼하고 있었나. 재경원측은 “은행감독원 국제부 인력이 1백50명이나 있지만 금융기관 해외점포에서 무리한 해외투자를 하고 있다는 팩스 한통 받지 못했다”고 감독원을 겨냥했다. 그런 재경원은 정권초기부터 금융기관의 해외업무에 대한 규제를 완화한다는 미명아래 필수적인 감독기능을 사실상 포기한 기관. 결국 고위험 해외자산을 운용하는 해외점포에 대한 감독은 거의 전무했다고 보는 편이 옳다.
1년에 한번 일부 점포에 대한 해외출장 정기검사로는 해외점포 감독이 제대로 될 수 없었다. 재경원은 지난해 12월에야 감독당국에 대한 자료제출 횟수를 크게 늘리고 현황파악을 면밀히 하겠다며 외양간 고치기에 나섰다.
▼엉성한 감독체계〓재경원은 92년부터 은감원에 종금사(전환 전에는 투자금융사)의 검사를 위임해왔다. 그러나 “외환업무는 들여다볼 필요없이 투자금융사시절부터 해온 단자업무만 살피라”고 제한했다.
은감원 관계자는 “나머지는 재경원에서 알아서 할 것으로 생각했다”면서 “작년 12월15일 30개 종금사의 자금조달 및 운용을 특별검사하라고 해 처음으로 해당 장부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은감원의 한 간부는 “외환부문은 재경원과 한국은행 국제부가 긴밀하게 협의해왔기 때문에 은감원에서 감독하겠다고 나서기도 어려웠다”고 말했다. 종금사와 은행의 외환관리를 점검하고 챙길 감독체계는 당초부터 허술하기 짝이 없었던 것.
재경원이 종금사에 내려보낸 업무방법서엔 ‘지침’이 없다. 재경원 실무과장은 이렇게 털어놓는다.
“작년초 종금사의 자산건전성 감독기준을 만들 필요를 느꼈다. 올해부터 시행하려고 업무계획에도넣었다.간단한기준을 들이대도 종금사는 맞출 능력이 없었다.”
은감원 관계자는 “수십년간 외국환업무를 해온 은행에도 작년 7월에야 ‘만기 3개월 미만의 외화부채는 70% 이상을 단기 외화자산으로 쓰는 것이 좋겠다’는 지도기준을 만들었는데 종금사는 말할 것도 없다”고 털어놓았다.
감독부재하에서 종금사들은 기아 등 수많은 기업들에 “만기는 3개월로 돼 있지만 계속 자동연장되므로 사실상 장기자금“이라면서 대출세일을 하기도 했다.
▼건전성 감독기준조차 없었다〓검사감독으로 금융기관 부실화를 예방하는 데는 인력부족 등으로 인해 한계가 있다. 이 때문에 세계 어느 나라이건 국제결제은행(BIS)기준 자기자본비율과 같은 지표를 정해놓고 최소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강제로 문을 닫는 등의 방법을 쓴다. 금융기관이 집단부실화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종금사들의 경우 이런 건전성지표가 아예 없다. 다른 나라 같으면 하루만에 결론이 날 부실종금사 폐쇄여부 판정을 정부가 두달이 넘도록 질질 끌고 있는 것도 이 때문. 재경원 L과장은 “인력이 모자라 현황관리 외에 종금사 감독은 엄두도 못낸다”고 실상을 전했다. 지표조차 없기 때문이다.
은행엔 BIS비율이 있지만 고무줄처럼 마음대로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는 ‘한국식’이어서 제구실을 못하기는 마찬가지. 예를 들면 은행이 주식투자로 2천억원을 손해봤다고 할 경우 국제기준에서는 이를 모두 반영하도록 하고 있으나 우리나라는 1천억원만 반영하는 등의 방법으로 억지 흑자를 만들어 부실은행을 건전은행으로 치장해왔다.
▼평소 검사는 하나마나〓종금사에 대한 감독 및 검사권한은 재경원이 모두 갖고 있으며 은감원은 위임 검사만 해왔다. 그나마 은감원의 은행 및 종금사에 대한 검사도 구멍투성이였다.
은행들이 종금사들로부터 무보증 기업어음(CP)을 사면서 종금사에 이면보증을 하도록 한 편법행위를 못본 체한 것은 은감원이라는게 종금사들의 주장이다. 은감원이 알고도 봐줬다는 의혹조차 금융계에서 일고 있다.
또 실제로는 신용도가 낮은 CP를 사놓고 은행신탁계정에 팔 때는 통장에 ‘A급어음’이라고 표시한 탈법영업도 당연히 평소 검사과정에서 드러났어야 했다는 것. 은감원측은 “은행신탁계정에 확인했어야 하나 재경원 관할이어서 그럴 수 없었다”고 둘러댔다.
〈윤희상·천광암·이용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