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 경제청문회④]「눈덩이 외채」 재벌 책임론

  • 입력 1998년 2월 12일 08시 27분


대부분의 한국 재벌기업들은 경제적 부가가치 등 수익보다는 매출액과 업계 순위에 매달린다. 재벌들은 고성장시대엔 ‘덩치’와 그룹 지명도를 배경으로 손쉽게 돈을 빌려 사업을 팽창시켰다. 회장실을 중심으로 상호지급보증과 내부거래 등을 통해 계열사를 늘리고 키워가며 국제시장에서도 큰소리를 쳤다. 그러나 재벌들의 무리한 투자는 돈벌이로는 0점. 엄청난 투자재원을 해외에서 빌려오는 ‘차입경쟁’ 끝에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다. 이같은 재벌의 실패가 외환위기와 국제통화기금(IMF)체제를 불러들이는 큰 원인이 됐으며 결국 IMF 감시하의 재벌개혁 태풍을 자초하고 말았다. ▼돈 빌리기 경쟁〓작년 하반기 이후, 특히 9월 말부터 본격화한 외환위기는 기업의 연쇄부도, 금융 부실, 무능한 정부의 합작품이었다. 그 중에서도 대기업들의 방만한 투자가 위기의 뿌리라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산업은행이 분석한 IMF 통계를 보면 81∼90년 10년간 국내 기업과 은행들이 국내외 은행을 통해 차입한 외화는 48억5천4백만달러. 매년 평균환율을 감안해 계산해보면 총 3조3천8백억원. 차입액은 94년부터 급증했다. 80년대 10년치보다 많은 6조3천억원이 그해에 들어왔다. 이어 95년 96년엔 각각 9조원 이상이 차입됐다. ▼ 작년 천억달러 빌려 써 ▼ 재벌들은 당국의 여신관리 규제를 받지 않는 해외주식예탁증서(DR) 전환사채(CB) 신주인수권부사채(BW) 등 해외채권을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 81∼90년 8천억원에 그쳤던 해외채권 발행액은 △94년 2조8천억원 △95년 4조9천억원 △96년 8조6천억원으로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무조건 빌리고 보자’는 심리가 기업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졌다. “외자 도입액은 잘 나가는 그룹 계열사일수록 많았다. 외국 금융기관들이 국내기업들의 실력을 알아주기 시작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기분도 좋았다.” (한 재벌그룹 관계자) 작년말 현재 1천5백69억달러(달러당 1천6백원으로 계산할 경우 약 2백51조원)의 외채는 누가 썼나. 빌린 주체별로 보면 금융기관이 1천1백15억달러로 가장 많다. 다음이 기업체로 4백34억달러, 정부가 20억달러. 금융기관이 빌려온 달러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에 대략 7대3의 비율로 흘러들어갔다. 결국 대기업이 1천억달러 가량을 빌려다 쓴 셈. ▼고철에 쏟아부은 달러〓들여온 외화는 설비투자에 집중됐다. 81∼90년 연 평균 10조원에 그쳤던 설비투자 규모는 94∼96년에는 35조∼56조원으로 늘어났다. 96년초 30대 재벌이 발표한 투자목표를 보면 기아그룹 32%를 비롯해 대부분 전년보다 30%가량 늘리겠다는 것. 대기업들, 예컨대 한보철강(11억달러) 기아그룹(3억2천만달러) 한라그룹(2억3천만달러) 등이 빌린 돈 중 일부는 결국 과잉설비투자에 쓰였다. 이 외채는 기업이 부도나면서 공중으로 증발하거나 가동되지 않는 고철(설비)로 남은 셈이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해외 현지법인들 가운데도 실패사례가 많다. 삼성전자가 갖고 있는 해외 자회사는 무려 85개. 이중 미국 컴퓨터 생산회사인 AST는 최근 결산실적이 1천7백45억원 적자다. 10억원 이상의 적자를 내는 곳만도 8개. 대부분 94년이후 해외투자 붐을 타고 인수한 회사들이다. 북미시장의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캐나다에서 현지법인 HACI를 인수했던 현대자동차도 96년 2천8백억원에 가까운 손해를 보고 손을 떼고 말았다. “대기업들이 사업성 검토나 제대로 해보고 해외에 투자했는지 의심스럽다. 일부는 사업확장보다는 해외 현지법인을 통한 외화차입에 주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한 금융 전문가) ▼과잉중복투자〓96년 1월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에서 낸 보고서엔 이런 구절이 들어있다. “어떤 기업이 이미 진출하고 있는 분야에 새로운 기업들이 진출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는 경우가 있다. …과잉중복투자라는 말이 성립하려면 적정투자의 기준이 설정돼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어느 정도의 투자가 적정한지 판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도대체 무엇이 과잉중복인지 한번쯤 되새겨보아야 할 일이다.” 재벌들은 미래의 수요를 예측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적정 투자액을 사전에 판단하기 어렵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누구도 ‘정확히’ 모를 일을 두고 왜 많으니 적으니 욕을 하느냐는 강변이다. 그 논리의 연장선에서 삼성의 자동차산업 진출이 이뤄졌고 재벌들의 이동통신산업 진출 러시가 벌어졌다. 재벌의 논리를 믿거나 지지했던 정책당국과 정치권은 국가부도 위기에 내몰린 뒤에야 문제를 파악하기 시작한 셈. 대기업들은 작년초에야 설비투자를 전면 동결하는 등 뒤늦게 투자축소에 나섰다. 그러나 이는 과잉중복투자에 대한 반성 때문이라기보다는 외자조달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는 평가다. ▼당국은 왜 통제하지 못했나〓정부가 재벌의 해외투자에 문제가 없는지 들여다보려면 재벌은 “이 시대에 웬 규제냐”며 ‘난리를 쳐댔다’고 정부 관계자들은 말한다. 재경원 한 관계자의 증언. “95년초 이석채(李錫采)당시 재경원차관은 재벌이 1억달러 이상 해외투자를 할 때 자기자본 20%를 부담하도록 했다. 그러자 재벌들은 생난리를 쳤다. 자율화시대에 무슨 얘기냐는 것이었다. 저금리 자금을 쓰도록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뒷다리를 잡아서야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청와대 지시로 이 조치는 몇달도 안돼 백지화하고 말았다.” ▼ 국민이 모두 뒷감당 ▼ 재경원 관계자는 “김영삼(金泳三)정권 출범 이후 재벌들이 외자로 무모한 사업확장에 나서면서 외채가 급증했다”며 “후유증을 우려했지만 ‘규제완화시책’에 밀려 정부엔 아무런 정책수단도 남지않게 됐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재벌들의 해외프로젝트는 대부분이 망하거나 부실해졌다. 만일 대우가 프랑스의 톰슨멀티미디어 인수에 성공한 상태에서 우리에게 외환위기가 닥쳤다면 IMF 구제금융으로도 위기를 넘기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재경원 관계자는 지적한다. 재경원 금융실 관계자들은 금융감독의 실종이 김대통령의 ‘세계화’에서 시작됐다고 입을 모은다. “94년 김대통령이 호주행 비행기에서 불쑥 ‘세계화’란 말을 꺼낸 뒤 온나라가 세계화에 매달렸다. 행정분야에서 세계화는 규제완화로 해석됐다. 부처마다 규제를 몇건 없앴는지 경쟁을 해댔다. 건수(件數)주의였다. 불필요한지 아닌지 따져보지도 않은 채 마구잡이로 규제를 풀어버린 것이다. 정작 없애야 할 건설 토지관련 규제는 그대로 놔두고 우리 경제에 치명상을 입힐지도 모를 외환부문에선 기업들의 희망사항을 거의 다 들어줬다.” 재경원도 분위기에 휩쓸려 규제풀기에 앞장섰다. 국민에겐 재벌의 해외투자 확대를 국력 신장이라고 선전하기도 했다. 재경원 관계자는 “규제완화의 결과는 경제효율이 아니라 특정재벌의 이익으로 돌아갔고 얼마 뒤 재벌들이 실패하자 국민이 모든 뒷감당을 하고 있는 꼴”이라고 말했다. 〈임규진·정경준·이용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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