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껏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고 있는 기아그룹사태는 정경유착으로 왜곡된 산업정책에서 비롯했다. 기아사태를 놓고 정부 금융권 기업의 세 주역은 악수(惡手)에 악수를 거듭, 외환위기를 증폭시켰다.
▼강경식과 김선홍의 싸움〓청와대는 94년 말 자동차업계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삼성그룹의 자동차사업 진출을 허용했다. 이는 김영삼(金泳三)정권이 초기에 목청을 돋워 주창한 업종전문화라는 산업정책의 마침표를 의미했다. 현대그룹에 제철소 설립을 불허한 명분이 ‘업종전문화’‘과잉중복투자’였기 때문.
이후 자동차업계는 무한경쟁에 빠져들었고 뒷심이 가장 약했던 기아가 무너지고 말았다.
기아사태를 처리해야 할 정책책임자인 강경식(姜慶植)당시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장관은 과거 삼성자동차의 부산 유치에 앞장섰던 인물. 그래서 기아문제는 더욱 꼬여만 갔다. 기아 노조가 주장하는 ‘삼성 음모론’은 갈수록 힘을 얻어갔다. 강 전부총리는 기아를 지원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할 때는 ‘시장주의’를 외쳐댔다. 그러면서도 물밑으로는 기아 처리에 직접 개입했다. 당시 정부의 생각은 무엇이었나.
“기아그룹은 회생하기 어렵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었다. 법정관리 후 제삼자에게 인수시키자는 복안이 일찌감치 결정돼 있었다. 하지만 김대통령은 ‘한보사태 이후 더 이상의 기업부도는 곤란하다’는 입장이었다. 청와대 지침은 한마디로 ‘부도를 내선 안된다’는 것이었다. 강 전부총리는 삼성유착설로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결국 기아사태는 곪을대로 곪아 한국 정부의 무능과 재벌의 부실을 전세계에 숨김없이 보여주고 말았다.”(재경원 고위관계자)
당시 김선홍(金善弘)기아회장은 ‘버티기’로 일관, 기아사태는 강경식―김선홍의 감정싸움으로 변질돼 갔다. 재경원 고위관계자는 “욕을 먹더라도 기아사태를 조기에 매듭지어야 했다”고 후회섞인 평가를 내놓는다.
그는 “막판 해결책도 정치권과 언론의 눈치를 보느라 최악의 카드가 됐다”고 고백했다.
▼기아 몰락의 서곡〓기아그룹 계열사들에 돈을 꿔준 금융기관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작년 4월경. 종합금융사들이 여신회수를 시작한 첫 상대는 기아그룹 계열 건설업체인 기산이었다. 96년말까지만 해도 ‘은행대출이나 다름없다’며 대출세일을 했던 종금사들의 태도가 돌변한 것이다.
제일은행 이호근(李好根)이사는 “종금사들이 기산을 부도위기로 몰고간 것은 4월23일이었고 5월말에는 아시아자동차, 6월초에는 기아자동차로 불이 번졌다”고 말했다.
7월초 유시열(柳時烈)제일은행장은 산업 조흥 신한 한일은행장 등과 서너 차례 만나 사태 해결을 꾀했다. 은행마다 입장이 엇갈려 협조융자는 전혀 불가능했다. 제일은행은 7월15일 ‘검토도 하지 않고 있다’던 부도유예협약 적용을 전격 발표했다.
당시 재경원은 “기아그룹 채권금융기관에 대해서는 적극 지원하겠지만 그룹 처리에는 개입하지 않겠다”며 겉으로는 방관했다. 그런데 9월초의 채권단대표회의는 “기아가 법정관리를 신청하지 않으면 긴급 자금을 한푼도 못 내준다”는 결론을 내렸다. 회의에 참석했던 한 은행관계자는 “기아의 화의(和議) 처리는 절대 불가(不可)라는 재경원의 방침이 내려와 있었다”고 말했다.
기아는 채권상환유예기간 만료 일주일 전인 9월22일 은행과 협의없이 화의를 신청했다. 그러나 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은행 관계자의 평가대로 재계 서열 8위였던 기아는 완전히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옆길로 새버린 기아 해법〓재경원은 기아를 ‘어딘가에’ 인수시키려 했다. 다음은 재경원 고위관계자의 최근 증언.
“정부는 기아가 작년 7월15일 부도유예협약에 들어갈 때까지 협조하는 입장이었다. 외형상 기아에 대해 한번 더 기회를 주자는 것이었다. 재경원은 종금사들에 부도유예협약에 참여하라고 권고까지 했다. 하지만 재경원은 결국 법정관리로 갈 것으로 예상했다. 공장을 완전가동해 자동차를 모두 팔아도 이자를 갚지 못할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기존주주의 주식이 소각된다. 기아의 가장 큰 주주였던 노조가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는 셈이다. 이렇게 되면 기아의 제삼자매각이 원활하게 이뤄질 것으로 봤다.”
정부가 기아 살리기보다 제삼자인수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얘기다. 강전부총리는 기아사태가 터진 직후 “정부는 개별기업 문제에 간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도 실제로는 직간접적인 개입을 계속했다.
특히 기아가 김회장체제를 전제로 자구노력에 나서자 강전부총리는 김회장의 퇴진에 초점을 맞췄다.
“정부가 김회장 퇴진을 고집한 것은 노조가 김회장을 선출해줬고 노조와 김회장이 동일선상에 있다고 본 때문이다. 김회장이 물러나면 그 자체로 상징적 의미가 있고 노조도 약해져 제삼자인수가 수월해질 것으로 봤다.”(재경원 관계자)
기아측은 ‘삼성음모론’을 무기로 저항했다. 결국 기아처리는 1백일을 끌었고 국가신용은 추락했다. 강전부총리는 최근 사석에서 기아처리와 관련한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밝혔다.
“기아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질질 끌었다고 하는데 여기에 대해선 그저 답답할 뿐이다. 기아그룹은 엄연히 부실기업이다. 그런 기업에 대해 자금지원을 해주지 않는다고 정치권이나 언론이 아우성을 쳤지 부실기업이므로 시장원리에 맡겨 해결하라는 얘기는 없었다.”
▼위기의 7월〓작년 7월초만 해도 경제여건이 호전되는 듯했다. 6월 무역수지가 모처럼 흑자를 냈고 3백억달러를 밑돌던 외환보유고는 6월말 3백33억달러로 다소 늘어났다.
그러나 7월 중순 기아가 사실상 부도를 맞으면서 한국 경제는 다시 급박한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부도유예협약 적용 이후 국제 금융계는 “10대 그룹에 속한 대기업이 부도나는 마당에 어느 기업에 투자하겠느냐”며 등을 돌렸다. 달러의 한국이탈이 가속화했다.
미국 신용평가기관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는 제일 등 5개 은행의 신용등급을 ‘요주의 대상’으로 낮추었다. 은행과 종금사들은 만기가 돌아온 외채를 상환하라는 독촉에 시달렸다. 달러를 단기로 빌려 장기로 돈장사를 하던 종금사들은 하루짜리 외채(오버나이트 론)를 빌려 외화부도를 막기에 급급했다.
작년 10월22일 기아를 공기업화한다는 정부 발표에 대한 외국의 시각은 더욱 싸늘했다. 그 때 IMF는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S&P는 즉각 한국의 장단기 국가신용등급을 한 등급씩 떨어뜨렸다. 더 하향조정하겠다는 입장도 발표했다. S&P는 “기아그룹 공기업화는 민간부문의 부실을 정부가 떠안는 것”이라며 “장기적으로 한국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는 치명타였다.
이 바람에 국책은행인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의 해외차입마저 막혔다. 재경원 관계자는 “기아의 공기업화가 신용등급 추락을 부를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강전부총리는 “공기업화 방안이 당시로선 최선이었다”고 훗날 재경원 간부들에게 말했다.
공교롭게도 정부가 기아를 공기업으로 만든다고 발표한 이튿날인 10월 23일 홍콩증시가 폭락했다. 서울에선 주가지수 500선이 무너졌고 하루에 결제해야할 달러 부족분은 3억달러에 육박했다. 외환위기는 결정적인 상황으로 접어들었다.
〈윤희상·임규진·백우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