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지갑 문을 꼭꼭 닫아버렸다. 상인들은 물건을 아무리 싸게 내놓아도 도대체 팔리지 않는다고 하소연한다.‘과소비 자제’를 넘어 소비심리가 급격히 냉각되면서 ‘쓸 것도 쓰지 않는’ 소비불황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19일 0시 서울 남대문시장 입구. 지방에서 상인들을 태우고 올라온 차량들이 일대 도로변을 꽉 채워 심야 운전자들에겐 ‘마(魔)의 구간’으로 불리던 곳.
불야성을 이루며 새벽까지 왁자지껄했던 시장풍경은 옛 얘기. 왠지 썰렁하고 활력을 잃은 분위기다. 상경하는 상인들이 격감하면서 차량 숫자가 크게 줄었다. 몇달전만 해도 주차하려면 한시간 정도 헤매야 했는데 요즘엔 빈자리를 금세 찾는다.
광주에서 올라온 40대 여자 의류상인은 “평소 1주일에 두세번씩 물건을 떼러 올라왔는데 작년말부터 한번으로 줄였는데 이대로 가면 이마저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시장안으로 들어서면 불황이 더욱 실감난다. 인파는 고사하고 웬만한 차량도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휑하다. 싸게 옷가지를 사려는 알뜰 쇼핑족으로 다소 붐비긴 해도 옛날의 북적대던 밤풍경은 온데간데없다.
상인 김모씨(52·여)의 말처럼 ‘정말 여기가 남대문시장인지 의심스러울정도’다.김씨는“손님도 줄었지만 그나마 10명이 오면 한두 사람이 살까말까 해요”라면서 대꾸하기도 귀찮은 듯 고개를 저었다. 19일 낮 인근 명동일대 백화점에도 사정은 비슷하다. 매장이 온통 ‘파격세일’ 등의 문구로 뒤덮여 있지만 썰렁하다.
의류코너의 판매 여사원은 “매출 부진으로 더이상 못견디고 철수하는 매장이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백화점에 들어오려고 기를 쓰던 브랜드들이 제발로 나가는 ‘믿기 어려운’ 현상이 속출하고 있다는 얘기.
소비불황은 특히 자동차 의류 등 소비재 부문에서 심각하다.
지난달 자동차 내수판매는 한달전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수준. 넘쳐나는 재고를 보다못한 자동차 업체들은 파격 할인경쟁에 나섰다. “출혈판매를 자제하자”던 합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깨져 버렸다. 30% 할인판매에다 살인적 고금리 속에 13%대의 할부판매금리를 내걸고 있다.
내구소비재인 가전제품도 마찬가지. 대리점마다 할인폭을 늘릴 만큼 늘렸는데도 손님의 발길이 뚝 끊겼다. 경기도 일산의 한 가전대리점 주인은 작년1월에 비해 매상이 40%나 줄었다고 푸념했다.
그런가 하면 의류 메이커들은 올들어 신상품 생산량을 40∼50%씩 줄였다. 재고로 떠안느니 최소한의 물량만 내놓은 고육책이다. 연간 1천억원 이상의 매출을 기록한 ‘공룡 브랜드’였던 꼼빠니아 씨 등도 올해 매출을 6백억원선으로 내려잡았다.
업체들은 요새 또 한가지 고민에 시달리고 있다. ‘가격을 올릴 것이냐 말 것이냐’는 문제다. 원자재 가격 폭등으로 원가부담은 높아졌으나 무작정 값을 올렸다간 매출 자체가 줄어들 게 뻔하기 때문. 지난달 우유 값을 올린 유업체들의 매출량은 10% 가량 줄었다. 어린이들의 생식품이라 가격에 별 영향을 받지 않는 품목인데도 이 정도다.
음식점도 타격이 심각하다. 서울 여의도의 경우 음식점마다 손님이 20∼30%이상 격감한 가운데 실비의 IMF식단을 마련, 손님유치에 나서고 있지만 테이블을 절반이상 채우기가 힘들다는 것.
20일부터 인상되는 택시요금에 대해 정작 택시기사들은 볼멘 반응이다. “그러잖아도 손님이 없어 사납금을 대기 벅찬데 요금인상으로 승객이 끊어지게 됐다”는 불평이다.
〈이명재·김상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