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년에 이어 두번째인 그의 방북은 표면적으로는 대북 영농지원이 그 목적이라고 하나 남북경협에 대한 북한측의 입장을 타진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북측과 새로운 사업에 합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명예회장은 89년 방북 때도 북한측과 △금강산 공동개발 △시베리아 원동(遠東)지구개발 공동진출 △원산 조선(造船)수리소와 철도차량공장 합작 등 3개 사업을 추진키로 합의한 바 있다.
이 사업들은 그후 6공과 문민정부를 거치면서 정부의 ‘정경분리 불가’ 원칙과 북한 끌어내기 정책의 실패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남북경협에 불신의 골만 깊게 했었다.
다행히 상황은 바뀌었다. 새 정부는 정경분리를 대북정책의 골간으로 천명했고 이를 실천할 구체적인 조치들을 취하고 있다. 기업의 입장에선 정치적으로 개선된 환경속에서 남북경협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셈이다.
남북경협과 기업인들의 방북은 88년 노태우(盧泰愚)대통령이 ‘7·7선언’을 통해 남북간 교류협력 추진을 선언하면서 이뤄지기 시작했다. 정명예회장의 방북후 김우중(金宇中)대우회장이 92년 1월에, 그리고 장치혁(張致赫)고합회장이 그해 9월에 각각 북한을 다녀왔다. 두 사람 모두 당시 남북기본합의서 채택(91년 12월)으로 남북관계가 비교적 좋았던 덕을 보았다.
그러나 김영삼(金泳三)정부에 이르러서는 북한핵위기로 남북관계가 급속히 냉각됐고 남북경협과 재벌 총수들의 방북도 사실상 중단됐다. 다만 북한핵위기가 해소되면서 96년 1월에 대우가 북한의 조선삼천리총회사와 합작으로 남포공단에 남북 최초의 합영회사인 ‘민족산업 총회사’를 세웠다.
그러나 의류를 만드는 이 회사는 경영상태가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우의 김회장은 이 회사의 경영정상화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지난해 9월 다시 북한에 다녀왔다.
통일부는 88년 7·7선언을 기점으로 지난달 말까지 방북한 기업인들은 3백93명에 이른다고 집계했다. 문제는 기업인들의 방북에도 불구하고 눈에 띌 만한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한기흥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