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은행여신담당 상무회의에 참석했던 재정경제부와 한국은행 관계자들의 얘기다.
정부는 중소기업 대출확대 및 무역금융 지원 등 기업자금난 완화책을 거듭 내놓고 있다.
그러나 금융기관들은 꿈쩍도 않고 있다. 금융 구조조정에서 살아 남기 위해 부실채권 회피에만 매달리고 있다.
‘정책 따로 시장 따로’의 현상이 극에 달하고 있는 것.
그러다보니 기업들의 정부에 대한 불신만 깊어간다.
재경부는 2일에도 금융권의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 촉진책을 내놓았다.
▼실태〓정부가 중소기업 자금난완화대책을 내놓은 지난달 중소기업에 대한 32개 은행의 대출은 오히려 8천억원 가량이 줄었다. 금융감독위원회 기업애로타개대책반의 집계다.
원자재수입 지원용으로 금융기관들에 넘겨진 세계은행(IBRD)자금 10억달러 가운데 지난 1개월간 집행된 액수는 3억8천만달러에 그쳤다.
정부는 금주부터 20억달러의 추가지원에 나섰지만 1차 지원분조차 시장에서 40%도 소화되지 않은 것.
한달이면 10억달러가 소진될 것이라던 정부 예상은 크게 빗나갔다.
한국은행은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 지원을 위해 2월에 총액한도대출을 3조6천억원에서 5조6천억원으로 2조원을 늘렸다.
그러나 이 가운데 중소기업에 대출된 것은 1조여원에 불과하다. 1조원은 금융기관에서 잠자고 있다.
중소기업 대출은 정부가 대책을 발표한 5월 중순 이후 더욱 얼어붙었다. 6월말에 국제결제은행(BIS)기준 자기자본비율을 맞추기 위한 은행들의 대출회수가 늘었기 때문이다.
자동차부품업체인 T사는 최근 주거래은행으로부터 대출연장 불가 통보를 받았다. 지금까지 잘 거래해 왔고 담보도 충분했는데도….
T사는 금감위 기업애로대책반에 이 사실을 신고해 최근 가까스로 대출연장을 받았지만 이같은 경우를 당한 중소기업은 한두곳이 아니다.
정부가 30억달러 가량을 시중에 풀었던 무역금융도 중소 수출입업체엔 ‘그림의 떡’이다.
철근을 수입해 건설업체 등에 공급하는 원자재 수입상 C사는 최근 정부발표를 듣고 수입신용장(LC)을 개설하기 위해 금융기관을 찾았다. 그러나 담보를 제시하거나 신용보증기금의 보증서를 갖고 오라는 요구에 발길을 돌렸다.
신용보증기금을 찾았지만 여기서도 담보를 요구했다. 결국 담보 없이는 정부의 어떤 대책도 빛 좋은 개살구인 셈.
▼정부 대책〓이규성(李揆成)재경부장관은 2일 김대중(金大中)대통령에게 금융경색 완화방안을 보고했다.
금융권의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 촉진을 위해 국제통화기금(IMF)과 합의한 통화량 증가 범위(4조5천억원)내에서 돈을 신축적으로 풀겠다는 것.
이에 따라 한국은행은 4조5천억원 범위내에서 돈을 풀어 현재 은행들이 보유중인 49조원 규모의 환매채(RP)와 통화안정증권을 부분적으로 매입할 방침이다.
또 중소기업의 회생을 돕기 위해 중소기업이 연체한 대출금과 은행이 대신 지급한 수입신용장 대지급금(代支給金)을 정상 여신으로 전환, 중소기업의 이자부담을 덜어주기로 했다는 것. 1∼2%포인트의 이자경감 효과를 기대하는 대책이다.
이와 함께 6월말을 기점으로 향후 6∼24개월로 돼 있는 BIS기준 자기자본비율 8% 충족기간을 가급적 뒤쪽으로 늦춰 은행들이 이 비율을 맞추기 위해 대출을 꺼리는 것을 막기로 했다.
또 은행들이 대출금중 일부를 떼어 강제로 예금시킨 돈을 대출금과 상계(예대상계)토록 기업의 부채규모를 줄여나가기로 했다.
정부는 이와 함께 은행들에 중소기업 대출 전담 기구를 만들도록 하고 기업이 도산해도 대출담당직원이 면책되도록 할 방침이다.
또 우량은행이라 해도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 실적이 부진할 경우 구조조정 과정에서 정부가 자금 지원을 해주지 않기로 했다.
정부는 이같은 대책이 제대로 시행되도록 모든 금융기관 창구에 대한 무기한 점검에 착수했다.
또 재경부 산업자원부 무역협회 등은 이날 무역금융 집행실태에 대한 전면 실사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같은 정부대책에 대해 금융권 뿐만 아니라 정부 내부의 시각도 회의적이다.
시중은행의 한 임원은 “결국 금융기관이 대출을 않고 담보를 요구하는 것은 신용리스크 때문”이라며 “잘못했다가는 금융기관이 망하는데 아무리 독촉해도 실제 행동으로 옮겨지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재경부 관계자도 “금융 구조조정을 조속히 마무리짓고 금융기관이 소신대로 자금운용을 할 수 있도록 환경을 바꾸지 않는 이상 정책의 실효를 거두기 어렵다”고 말했다.
〈반병희·박현진기자〉bbhe424@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