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 느끼는 ‘경제불안 지수’가 매우 높습니다. 일부 외국인 분석가들은 한국이 올 하반기에 견디기 어려운 최악의 경제난을 맞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아마도 금년 하반기가 구조조정의 고통을 가장 크게 느끼는 기간이 될 것입니다. 외국인들의 관측도 한국이 구조조정의 절박함을 쉽게 잊는다는 ‘건망증에 대한 경고’라면 달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경제 자체의 활력을 무시하는 말이라면 수긍할 수 없어요. 한국민은 순경(順境)은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감이 있지만 역경(逆境)은 잘 극복해냅니다. 제조업과 금융산업도 지금의 역경에 적응해나갈 걸로 봅니다. 물론 내년 전반기에도 슬럼프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아마 내년에도 올해에 이어 마이너스 성장을 감수해야 할지 모릅니다. 실업은 올해말에서 내년초에 최고수준을 기록할 것이고 국제수지는 금년 하반기부터 흑자기조가 둔화할 전망입니다. 그러나 내년 하반기에 들어서면 거시지표가 분명히 반전하고 고용도 증가할 것으로 봅니다. 물론 경기가 반전되면서 물가상승 압력을 받을 것이 걱정됩니다. 전체적으로 내년 가을경에 우리 경제의 저점 통과가 가능해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일각에서는 지난해와 같은 자본유출에 따른 제2의 외환위기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있습니다만….
“개방과 자유를 원칙으로 하는 시장에서 자본유출이 발생할 수 있다는 개연성을 완전히 부인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80∼90%의 확률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경제 외적으로 국내 정치상황과 남북관계가 작년보다 안정돼 있습니다. 또 대통령이 제2의 외환위기가 발생하면 즉각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미국으로부터 받아낸 것도 국제사회에 신뢰감을 불어넣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구조조정 일정이 구체적으로 잡혀 한국경제 상황에 대한 예측가능성이 높아지면 자본유출의 가능성은 더욱 적어질 것입니다. 다만 일본과 중국의 통화가 큰 폭으로 평가절하될 경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 우려됩니다. 그러나 최근 엔화 약세에도 불구하고 서울외환시장에서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이 안정적으로 움직이는 등 단기자본이 빠져나가려 하는 조짐은 보이지 않습니다.”
―금융 외환위기에서 좀더 확실하게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작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외환위기의 첫번째 원인은 금융제도가 전근대적이었다는 점입니다. 과도한 여신, 시장원리와 동떨어진 후진국적 관치금융, 시장원리를 무시한 환율관리제도, 금융감독기능의 낙후 등이 얽히고 설켜 외환위기를 초래한 것입니다. 하나 더 추가한다면 국제외환시장의 조류에 편승하지 못하고 너무 동떨어져 있었다는 점입니다. 전세계 외환거래규모는 하루 2조달러에 달할 만큼 급팽창했는데도 우리는 이에 둔감했어요. 적응력을 상실한 것이지요.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두가지 변수를 모두 체크해야 합니다. 하나는 외생변수입니다. 현재 우리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인도네시아 태국 등 전체 아시아권 경제가 불안합니다. 외생변수 때문에 우리 경제가 더욱 침체했지만 이는 어쩔 수 없어요. 문제는 내생변수입니다. 얼마나 빨리, 그리고 효율적으로 구조조정을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구조조정 당사자들은 모두 ‘총론 찬성, 각론 반대’의 입장을 취합니다만 구조조정의 조기 완결이 경제위기 극복의 지름길입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국부가 엄청나게 유출될 것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만….
“정태적으로 보면 국부 유출이라는 표현을 쓸 수도 있습니다. 자산가치가 크게 떨어진 상황에서는 외국인들이 훨씬 싼 값에 국내 부동산과 기업을 살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외국인 투자로 공장가동이 정상화하고 부가가치가 늘어 자산축적이 가능해진다면 외국인이 싼값에 국내 자산을 매입했다고 하더라도 이를 국부 유출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동태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구조조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부는 구조조정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원리에 입각해 추진돼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구석구석 개입하는 양상입니다. 관치해소는커녕 관치가 심화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는데요.
“지금처럼 경제의 불확실성이 높은 상황에서는 구조조정의 기본방향이나 우리 경제의 진로를 제시해 각 경제주체의 합리적 대응을 이끌어내는 것도 정부가 맡아야 할 일입니다. 실제로 정부로서는 구조조정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받아들이는 쪽에서 마치 명령이나 지시로 생각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기업집단간 업종교환의 뜻으로 쓰이는 ‘빅 딜’이라는 것도 결국은 효율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가이드라인입니다. 그런데도 해당 기업들에는 ‘그렇게 하라’는 지시로 비치는 거죠. 이런 현상은 정부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을 하면 불이익이 있다는 그동안의 관행이 굳어진 결과라고 봅니다. 물론 금융기관의 경우 감독권한을 갖고 있는 정부가 필요하면 손을 댈 수 있습니다. 다만 구조조정 과정에서 정부가 특정기업의 퇴출 여부와 같은 구체적 개별적 사안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정부와 여당은 구조조정과 실업대책의 재원 마련을 이유로 적자재정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재정적자 상태에 들어가면 헤어나기 어렵다는 우려도 적지 않은데요.
“어느 입장에 서느냐에 따라 적자재정에 대한 견해가 다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케인스주의자들은 적자재정을 나쁘게 보지 않지만 통화주의자나 자유주의자들은 적자재정에 반대합니다. 한국은행총재가 아닌 경제학자로서 개인의견을 말한다면 금융시장이 제대로 작동할 때는 통화금융정책을 통해 구조조정을 지원해야겠지만 금융시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신용경색 상황에서는 필요하다면 적자재정을 선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총재께서는 바람직한 소비란 어떤 것이라고 보십니까.
“소비심리가 너무 위축돼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소비가 더 활발해야 할 측면이 있습니다. 노랑이는 쓸 데와 안쓸 데를 가리지 않고 모두 안쓰는 사람이고 구두쇠는 쓸 곳엔 쓰는 사람입니다. 쓸 데와 안쓸 데를 가리는 절제된 소비정신이 필요합니다. 물론 우리나라가 많은 외채를 갚아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불요불급한 소비와 계층간 위화감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는 소비는 계속 줄여야겠지요. 그러나 정부가 소비재 수입을 억제하는 운동에 앞장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정리〓이강운·이용재기자〉kwoon9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