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초 LG그룹이 질적 양적으로 재계 선두를 차지하겠다며 내걸었던 ‘그룹비전(장기목표)’이다. 96년 이 그룹의 매출은 62조원 규모. 5배가 넘는 매출목표를 맞추기 위해선 엄청난 시설투자를 해야 한다는 계산.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체제로 재벌의 차입경영과 덩치키우기가 집중포화를 맞으면서 이 매출목표는 슬그머니 사라졌다. 내부자거래와 상호지급보증 등으로 묶였던 계열관계도 ‘문화와 브랜드를 나눠 갖는 독립기업들의 느슨한 협력체제’로 바뀌었다.
LG뿐만이 아니다. 불과 1년전 대재벌들의 경영목표를 살펴보자. 매출 시설투자목표 외에 수익성 목표는 어느 재벌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5대그룹 계열사의 경우 대개 전년도 실적의 몇 %를 올리는 식으로 경영목표를 짰던 게 관례. IMF한파가 본격화된 지금 남아있는 양적 목표는 수출뿐이다.
매출목표의 ‘실종’은 재벌의 경영목표가 수익성을 중시하는 쪽으로 서서히 변화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시장점유율 확대를 통해 재계 위상과시와 고용창출을 노렸던 기업경영이 주주 이익을 중시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는 얘기. 당연히 이사의 권한이 강화되고 다른 계열사와의 (내부)거래에서도 불공정한 게임이 사라지고 있는 것.
대그룹 계열 보험사 임직원들은 요즘 이제 막 국내에 도입된 ‘이사책임보험’요율(料率)을 산정하는 데 고심중이다. 권한이 막강해진 만큼 책임이 커져 ‘보험을 들어주지 않으면 이사를 맡지 않겠다’는 ‘간 큰’ 임원들이 늘어났다. 총수의 ‘친위대’격인 그룹 비서실의 힘이 약화되면서 이사들은 점차 주주의 눈치를 본다. 한국재벌체제를 지탱해준 3대 기둥은 △상호지보 △내부자거래 △비서실체제. 이 기둥들이 이처럼 한꺼번에 흔들리면서 재벌체제는 해체위기를 맞고 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현대 삼성 대우 LG 등 내로라하는 재벌체제가붕괴한다는시나리오는너무 성급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
한국 재계 총본산인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요즘 ‘지주회사 전면허용’을 이끌어내기 위해 열띤 홍보전을 전개하고 있다. 업종 지분에 있어 제한적으로 허용된 지주회사가 전면 해금되면 상호지급보증 등으로 묶여있던 재벌 계열사들은 수직적으로 재편할 수 있게 된다.
삼성그룹의 한 임원은 “그동안 재벌 계열사들은 삼국지 적벽대전에서 연환계에 묶인 조조군과 같았다”며 “순수 지주회사가 허용되면 비서실 조직은 지주회사, 계열사들은 지분관계에 따라 종적으로 묶여 활력이 높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물론 수십개 사업부를 하나의 회사에 통합시킨 미 제너럴 일렉트릭(GE)처럼 대규모 사업지주회사가 한국재벌의 미래 모습이 될 수도 있다. LG경제연구원은 그러나 “재계의 세대교체가 이뤄질수록 최고 경영자들은 큰 부담을 안는 사업지주회사 형태를 기피할 가능성도 있다”고 분석한다.
한국 재벌의 생명력은 IMF체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IMF를 빨리 벗어날수록 한국 재벌체제의 세계시장 진입을 경계했던 미국 등 선진기업의 입김이 사라지고 ‘적법한’ 내부거래를 통한 ‘규모의 경제’의 이점을 정부가 무시하기 어려울 것으로 재계는 기대한다.
외부차입이나 총수의 전횡 등은 철저히 견제하지만 일정 가동률을 올리기 위한 내부거래는 보장할 것이란 전망. 전경련 관계자는 “‘큰 것’으로 치닫는 국제 현실에서 다양성과 규모의 경쟁은 피할 수 없다”며 “뭉치는 것이 효율적인 한 재벌체제는 쉽게 버리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주주이익에 충실한 독립기업 형태의 미국식보다는 상당기간 독일 일본식 기업모델이 대세를 이룰 가능성이 높다. 또 경영에서 투명성이 훨씬 강조되는 만큼 재벌이 특혜집단이란 오명도 서서히 벗을 수 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본다. ―끝―
〈박래정기자〉eco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