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재벌해체」수순 밟나…정책당국자 「압박」발언에 긴장

  • 입력 1998년 10월 25일 18시 57분


지난해 말 김대중(金大中)대통령당선자와 경제 5단체장 모임을 마치고 나온 재벌그룹의 한 총수는 “기업 하면서 처음으로 후련한 얘기를 들었다”며 새정부에 대한 우호적인 기대감을 표시했다. ‘규제개혁 등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당선자의 약속에 한껏 고무됐던 것.

신정부 출범 8개월이 지난 지금 현 정부의 이같은 청사진을 기억하는 재계인사는 거의 없다. 오히려 정권초 통과의례처럼 치렀던 ‘길들이기’차원을 넘어 사실상의 ‘재벌해체’ 공세에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재계는 ‘위기극복’을 위한 기업 구조조정에 한 목소리를 내면서도 대기업을 향한 당국자들의 잇따른 강성발언이 암시하는 ‘정책의 끝’이 무엇인지 극도로 우려한다. 지금 재벌총수들 사이에선 “국민의 정부가 정말 재벌을 해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팽배하다.

▼‘환란(換亂)의 주범은 재벌’〓IMF 위기와 함께 출범한 현 정권 실세들 사이에서 ‘재벌〓환란의 배후’라는 등식은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대통령과 재벌총수간 몇차례 회동이후 재벌에 대한 시각은 표면적으로는 ‘위기극복의 동반자’로 바뀌었을 뿐 ‘변혁의 대상’이란 본질에선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다만 화급한 외자유치가 사실상 재벌에 달린 만큼 정부는 재계의 협력이 아쉬웠던 것.

그러나 최근 외자도입과 재벌들의 ‘몸통 잘라내기’가 지지부진하다는 여론이 들끓으면서 정부는 점차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정부 정책의 기획을 총괄하는 김태동(金泰東)청와대 정책수석은 최근 TV대담에서 “재벌총수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지만 마지막 기회를 잃고 있다”며 ‘몸통을 내놓을 것’을 촉구했다.

김수석은 한술 더떠 김우중(金宇中)전경련 회장을 지목,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는 분이 외국에 나가 돈도 꾸지 못한다”며 “외국돈도 제대로 꿔 오지 못하면서 엉뚱한 소리만 하고 있다”고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전문관료 출신 고위당국자들의 재벌관도 점차 강경해지는 분위기. 이헌재(李憲宰)금융감독위원장은 최근 채권은행단과의 조찬모임에서 “5대 재벌이 구조조정을 하기 싫다는 핑계만 늘어놓는다”고 강하게 비판했다.재벌과 함께 환란의 주범으로 치부됐던 산업자원부나 재정경제부 관계자들도 ‘끊임없이 닥달해야 하는 대상’으로 재벌을 평가한다.

▼‘재벌해체’ 수순 밟는가〓‘재벌해체’를 공식 언급한 고위당국자는 아직 없다. 대선 직후 김 당선자가 보다 완곡하게 ‘업종전문화’, 김원길(金元吉)국민회의 정책위의장이 ‘빅딜론’을 제기했다 논란이 불거지자 후퇴했었다.

그러나 6월 김중권(金重權)청와대 비서실장의 ‘빅딜 임박’발언으로 정부 및 정치권이 물밑에서 재계 판짜기를 추진했음이 드러났고 정부의 이같은 의도는 7월 1차 정재계 간담회에서 ‘업종별 구조조정’ 요청으로 공식화됐다.

정부는 몇차례의 무산위기를 넘긴 끝에 재계가 이달 중순 7개 업종 자율구조조정안을 발표하자 이제 이업종(異業種)간 상호지보 해소로 ‘칼끝’을 바꾸며 재벌을 향한 정책의 강도를 갈수록 높이고 있다. 재벌 상호지보의 80%에 가까운 이업종 상호지보가 해소되면 얽히고 설킨 현재의 재벌체제를 소그룹 단위로 재편하기가 한결 쉬워진다. 이와 관련, 재계는 이 금감위원장이 9월 한 사석에서 “재벌그룹을 독립적인 건전기업으로 분할하는 과정이 곧 기업구조조정”이라고 강조한 데 주목한다. 전경련 관계자는 “6대 이하 재벌은 사실상 해체됐다”며 “50∼60개 계열을 거느린 5대 재벌도 앞으로 소그룹 단위의 통합이 이뤄지면 3,4개 기업군으로 남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헷갈리는 재계〓5대 재벌은 그동안 정부측 의도를 ‘재벌체제를 봉쇄하되 현 소유―경영체제는 유지하는’쪽으로 이해했다. 김우중회장도 수시로 정부와의 협력관계를 강조했던 것이 사실.

그러나 최근 고위 당국자들의 ‘소유―경영 분리’발언이 잦아지면서 재계는 바짝 긴장하는 분위기. 지배구조 투명성 확보와 재무구조 개선에 초점을 맞췄던 재벌개혁이 극단적으로는 ‘재벌총수의 경영배제’쪽으로 치달을 가능성에 신경이 예민해져 있다. 5대 재벌 과연 해체수순에 돌입한 것인가.

〈박래정기자〉eco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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