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대그룹 구조조정합의]한국형재벌체제 「기업연합체」로

  • 입력 1998년 12월 7일 19시 12분


금융산업 부문의 빅뱅에 이어 한국 재벌의 구조를 바꾸는 새판 짜기가 시작됐다.

7일 정부 재계 채권단 간담회에서 정부와 5대 재벌이 전면적인 구조조정 방안에 완전 합의함에 따라 계열사간 강력한 연대를 특징으로 하는 한국형 재벌체제는 지금보다 훨씬 느슨한 ‘독립기업 연합체’로 탈바꿈할 중대계기를 맞았다. 특히 이번 개혁작업은 한국사회에서 특혜집단으로 인식되어온 재벌이 ‘오명’을 씻을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전경련 고위관계자는 이날 “재벌들은 이제 근본적인 구조개혁 외에는 대안이 없음을 알게 됐다”며 “향후 정부와의 긴밀한 협조를 토대로 5대 그룹의 구조조정은 급류를 타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쌍용 기아 등 6대 이하 재벌의 사실상 해체에 이어 5대 그룹이 몸통을 도려내는 ‘대수술’의 실행계획을 구체화함으로써 김대중(金大中)정부의 기업개혁 작업은 연내에 대강의 틀을 마무리할 것으로 보인다.

▼정부―재계,‘신(新)협력시대’ 개막〓정재계 합의사항은 기본적으로 정부의 재벌개혁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읽은 재계가 ‘선단식 기업운영’을 포기하는 대신 정부가 제시한 ‘당근’을 받아들임으로써 가능했다.

손병두(孫炳斗)전경련부회장은 “이번 합의로 한국의 대그룹들은 강력한 설비와 건전한 재무구조를 바탕으로 국제시장에 나설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정부의 당근은 각종 세제지원 및 금융권의 출자전환 등이 주류. 현금흐름이 양호한 재벌계열사에 대한 채권 출자전환 방침(워크아웃) 등도 같은 맥락이다.

▼‘재벌 선단(船團)’이 느슨한 독립기업 연합체로〓정부와 재계는 ‘2000년 3월 상호지보 해소’라는 기존 일정을 재차 확인했다. 공정거래위원회와 금융감독위원회 등이 재벌체제의 양대 근간인 △부당내부거래 △상호지급보증을 원천적으로 차단해온 결과다.

재계가 일단 올해 말까지 해소해야 할 이업종(異業種)간 상호지보액은 모두 11조원 규모. 현대종합상사가 2조2천억원의 채무보증을 받는 등 현대건설 대우중공업 삼성중공업 등 덩치 큰 재벌사들이 대거 상호지보에 묶여있어 그룹별 구조조정에 걸림돌로 작용해왔다.

주채권은행은 일단 부실사에 대한 우량사의 지급보증에 대해 가산금리를 부과하는 등 시장원리에 따라 처리한다는 방침.이에 따라 부실계열사 부도가 다른 계열사로 연쇄 파급되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일단 제동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계열사간 고리가 끊어지면서 소그룹별 통합이 순조롭게 이어지면 최대 63개의 계열사를 거느렸던 재벌체제는 10여개 정도의 대형기업군(群)으로 재편된다. 대주주의 전횡이 차단되고 독립경영체제가 자리를 잡아가면 현 재벌체제는 2000년쯤엔 비슷한 사내 문화와 이념을 공유하는 개별기업의 연합체로 바뀔 것으로 재계는 전망한다.

▼‘부실은 빅딜로 해결’〓7개 빅딜업종중 항공기는 현대 삼성 대우가 각각 내놓을 사업부문을 자산가치에 따라 평가해 지분을 결정하기로 했다. 외자 한도는 최대 50%로 결정됐다.

철도차량도 99년 말까지 부채비율을 200%이하로 낮추기로 하고 외국인 투자와 대출금 출자전환을 병행 추진하기로 절충했다. 한국중공업과 재계가 마찰을 빚었던 발전설비 등은 현중의 설비 토지 자산 부채 등 일체를 한중이 받아들이되 민영화시 현중이 지분요구를 하지 않기로 합의. 채권단은 또 “사업성이 없다”고 반려했던 유화부문에 대해서도 “15일까지 실효성있는 실행계획을 짜내라”고 방침을 바꿨다.

다만 ‘합병이냐, 피합병이냐’를 놓고 희비가 엇갈릴 반도체는 △15일내에 경영주체를 선정한 뒤 △99년 말까지 경영주체와 채권은행이 손실을 분담해 부채비율을 200%이하로 낮춘다는 일정에만 합의했다.

7일 간담회의 하이라이트로 손꼽힌 삼성자동차와 대우전자의 맞교환은 15일까지 실천계획을 내놓기로 합의됐다. ‘명예로운 자동차사업 퇴진’을 바라는 삼성과 ‘그룹 재무구조 개선’을 바라는 대우의 입장이 맞아떨어진 결과. 다른 그룹의 몸통교환을 촉발할 조짐이다.

▼산적한 과제〓우선 정부는 세제 금융지원 약속으로 재계를 채근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지만 재계는 당장 거래업체 노조 등을 설득해야 하는 난제에 봉착해 있다. 사업구조 재편과정에서 △자산평가 △이질적 기업문화의 융화 △고용 설비 조정 등에서 그룹간 그룹내 이견이 불거질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우려다.

그룹 구조조정본부는 특히 구조조정 과정에서 나타날 소액주주라는 ‘돌발변수’를 걱정한다. S법무법인의 한 관계자는 사업구조조정이 대부분 합병이나 사업부문 분리 형식을 취할 것으로 전제하고 “주총결의가 1차관문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부실계열사 인수를 우량사 주주들이 좌시하지 않을 것이란 지적. 현행 상법은 총 발행주식의 3분의1이나 주총 출석지분의 3분의2에 해당하는 주주들이 합병에 반대할 경우 결의가 불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특히 외국인 지분이 많은 대기업이 구조조정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등 주력업종의 간판기업들은 대개 10∼40%대의 외국인 지분분포를 보이고 있어 외국투자가들을 설득하는 것이 만만치 않다.

〈박래정기자〉eco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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