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반도체는 그동안 증자 등을 통해 금융제재기간을 버텨나갈 비상자금 4천억원 가량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기존여신의 만기도래분에 대해 연장을 해주지 않는 본격적인 제재에 돌입하면 상당한 애로를 겪을 전망이다.
그러나 정부와 재계가 중재에 나서고 있어LG에 실리를 보장하는 선에서 현대와 LG간 대타협이 연내 이뤄질 것이란 전망이 설득력있게 나오고 있다.
▼단계적 압박작전〓28일 금융제재를 논의하는 회의에 참석했던 한 은행장은 “(정부가 제재방침을 밝힌) 이런 분위기에서 LG에 신규여신을 내줄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금융권이 ‘현대에는 책임이 없으니 LG가 현대와 타협안을 마련하라’는 정도로 촉구한 것은 압박작전의 첫 단계. 일단 LG반도체측에 결렬의 책임이 상당히 있음을 암시하면서 여신중단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다음 단계는 단기성 자금의 회수. 보통 만기가 3개월 정도인 기업어음(CP)을 포함해 단기적인 여신의 만기도래분 중 일부를 연장하지 않고 상환받는 것.
LG반도체가 진 빚 7조4천8백억원 중 만기 1년이내의 단기여신은 모두 4조2천억원. 금융계는 LG반도체가 단기부채의 비중이 높아 만기도래분이 연장되지 않고 상환이 시작되면 버티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금융제재가 시작되면 해당기업은 물론 그룹전체의 신용도가 하락하고 결국 국가신용도도 하락하게 된다. 7조원에 이르는 금융권의 채권이 부실채권으로 물리게 되면 금융권도 중장기적으로 속병을 앓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은행장들이 모여 금융제재방침을 정하더라도 재무구조개선약정상 이를 즉각 시행하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있다. 5대그룹과 주채권은행간에 체결한 수정 재무구조개선 약정에는 ‘구조조정을 이행치 않을 경우에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두차례에 걸쳐 경고를 한 뒤 제재에 돌입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
▼타협 낙관론 왜 나오나〓채권단은 현대와 LG간의 협상 타결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채권단 관계자는 “여신중단 등 금융제재가 실제로 진행될 경우 누구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청와대와 금융감독위원회는 LG그룹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현대 주도의 반도체통합이 원만하게 타결될 것으로 낙관하고 있다.
강봉균(康奉均)청와대 경제수석은 28일 “통합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당사자간의 이해득실을 따져 합의하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해 양사가 절충할 가능성을 충분히 열어놓고 있다.
금감위 관계자도 “금감위의 공식입장은 원칙대로 LG에 대해 금융제재를 해야한다는 것”이라면서도 “29일부터 금융제재가 이뤄져도 31일까지 시간이 있는 만큼 LG와 현대가 원만한 타협을 이룰 것”이라고 말했다.
평가기관인 미국 ADL사를 제소한다는 LG측의 강경한 입장을 감안할 때 정부측의 낙관론은 다소 의외라는 게 재계 및 금융계의 반응이다.
이에 대해 금감위 관계자는 “금감위가 겉으론 불간섭주의를 내세우고 있지만 물밑으로 LG와 현대간의 중재노력을 계속해왔다”고 말했다. 금융계에선 청와대가 중재안을 들고 양그룹을 설득하고 있다는 얘기도 나돌고 있다. 정부나 LG 모두에 타협만이 살길이기 때문. 즉 정부로선 그간 추진해온 재벌빅딜이 모두 무산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LG측의 ‘버티기’를 수용할 수 없는 처지다. LG그룹으로서도 현 정권과의 ‘전면전’까지는 벌일 수 없는 입장.
▼LG,강경대응 속 실리 꾀하는가〓LG반도체는 28일에도 “ADL의 평가가 원인무효이므로 금융제재를 받을 이유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와 별도로 LG는 ADL사를 미 법원에 제소하기 위한 실무작업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LG는 통합법인 경영주체 발표 이전부터 ‘최악’의 상황을 가정, 그룹 고문변호사와 국제소송 전문가들로 전담팀을 이뤄 제소 문제를 검토해왔다. LG반도체 한 임원은 그러나 “제소 시기나 방법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LG반도체는 이와 함께 이날 “외화차입금중 일부를 만기가 오기 전에 미리 갚겠다”고 일부 종금사에 제의, 제2금융권의 경쟁적인 여신회수에 대비해 ‘행동계획’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현대전자는 이날 김영환(金榮煥)사장 명의로 구본준(具本俊)LG반도체 사장 앞으로 공문을 보내 “반도체 분야 신설법인의 설립방안을 협의하기 위해 양사가 회동하기를 바란다”고 공식 제의했다. LG측은 아직 공식 답변을 하지 않고 있지만 현대측의 제의에 응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LG의 한 관계자는 “은행권의 금융 제재가 현실화할 경우 살아남을 기업이 어디 있겠느냐”며 “이제는 현대전자와 협상을 벌여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한편 재계에서는 LG그룹이 반도체 경영권을 넘겨주는 대신 △데이콤 등 이동통신 지분이나 개인휴대통신 사업영역 확대 △보람은행 지분확대를 통한 은행업 진출 △여천유화단지의 통합 등을 시도할 것이란 관측이 팽배해지고 있다.
▼정부와 전경련 중재 착수〓정부는 ‘겉으로는 강경, 속으로는 대타협 시도’로 나서고 있다. 27일 저녁엔 이헌재(李憲宰)금감위원장이 구본무(具本茂)LG그룹회장과 정몽헌(鄭夢憲)현대그룹회장을 각각 만나 의견조율을 했다. 특별한 성과는 없었지만 최고책임자간 대화가 이뤄졌다는 점에서 대타협의 가능성을 높여줬다는 분석이다.
특히 금감위는 채권금융단의 금융제재에도 불구하고 “연말까지 시간이 있다”며 LG와 현대간의 원만한 협상을 촉구해 왔다.
한편 전국경제인연합회는 ‘반도체 통합의 원칙과 시한, 제재방법까지 정해진 상황에서 중재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던 것과는 달리 28일 손병두(孫炳斗)부회장이 양사 사장과의 회동을 추진하는 등 중재에 착수했다.
전경련 관계자는 “여신제재는 곧 다른 그룹의 대외신인도에도 악양향을 미치는 만큼 파국을 막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재계에 형성됐다”며 “손부회장이 일단 양측 최고경영진을 잇따라 만나 조율 가능성을 타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김우중(金宇中)전경련 회장이 적극 중재에 나서 양그룹 총수간의 대타협을 이끌 것으로 재계는 전망하고 있다.
〈박래정·임규진기자〉eco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