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금리시대 이색풍경]기업-은행「빚상환 실랑이」

  • 입력 1999년 3월 22일 18시 51분


“돈을 갚겠다는데 왜 안받습니까. 받아주세요.”

“갚지 않아도 됩니다. 좀더 쓰시죠.”

대형 건설업체인 A사는 올들어 은행 부채 수백억원을 갚으려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장벽’에 부닥쳤다. 은행측으로부터 “돈을 못받겠다”고 거절당한 것이다.

심각한 자금난을 겪은 A사가 지난해 돈을 빌릴 때의 금리는 평균 연15%선. 지금은 금리가 연8∼9%선으로 떨어졌다. A사는 얼마전 유상증자에 성공해 수천억원대의 여유자금을 확보했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이 돈을 갚고 싶은 입장.

반면 은행측은 고금리 수익을 계속 챙기겠다는 계산이다. 그만한 거액을 돌려받아봐야 굴릴 데가 마땅치 않기 때문.

A사는 고심중이다. 매달 들어가는 수억원의 추가비용을 생각하면 하루빨리 갚아야 하지만 은행측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한다.

“기어이 갚겠다고 고집피우다간 혹시 은행에 밉보이지 않을까 걱정도 되고….”

결국 이 회사는 거액의 여유자금을 쌓아놓고도 고율의 이자를 계속 물고 있다. A사의 임원은 “기업생활 20여년 만에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황당해했다.

중화학업체인 B사의 회장도 최근 비슷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B사도 지난해 연14∼15%에 빌려쓴 수백억원을 올해초 상환하려고 했다. 그러나 역시 은행에서 곤란하다는 반응이 나왔다. 줄다리기끝에 B사는 일단 절반만 갚고 나머지는 몇달 뒤에 다시 논의하기로 절충했다.

B사 관계자는 “한참 어려울 때 돈을 빌려준 ‘의리’를 생각해서라도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고 털어놨다.

요즘 은행과 기업간에는 이런 실랑이가 심심찮게 벌어진다. 기업은 “돈좀 꿔달라”고 아쉬운 소리를 하고 은행은 “빨리 갚아라”고 큰소리치던 과거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풍경인 셈이다.

은행―기업관계가 역전된 이유는 기업들이 자산매각이나 유상증자로 현금을 확보한데다 신규투자는 줄여 자금이 남아돌기 때문. 이 자금을 지난해 ‘IMF고금리’로 빌린 부채를 갚는 데 사용하려는 것이다.

반면 자금운용에 신중해진 은행측은 돈을 안정적으로 굴릴 데가 없는 형편에서 “갚겠다”는 돈을 무조건 받을 수도 없는 입장.

일부 은행은 중도상환을 막기 위해 만기 전에 갚는 돈에 대해선 수수료를 물리는 제도까지 도입하고 있다. 신한 하나 한미 한빛은행 등이 이달초부터 이를 시행중이거나 검토중이다.

삼성그룹의 한 관계자는 “요즘 은행에서 돈이 필요하지 않느냐고 묻는 전화가 자주 걸려온다”면서 “1년만에 기업과 은행의 처지가 뒤바뀐 것 같다”고 말했다.

〈이명재기자〉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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