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품 규격화」업체-정부 무관심에 『게걸음』

  • 입력 1999년 4월 4일 19시 55분


산업경쟁력을 크게 높여줄 ‘제품 및 서비스의 표준화 규격화’가 외면을 당해 국가적으로 막대한 낭비가 초래되고 있다. 조립 납품업체들은 물론 유통업체들까지 규격 통일화에 무관심하거나 자사 이기주의에 매몰된 탓이다. 특히 ‘산업경쟁력을 높인다’는 명목으로 재벌간 빅딜(대규모 사업교환)을 주도해온 정부가 막상 원가절감과 자원효율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제품표준화에는무관심하다는 비판도 일고 있다.

▽‘도량형’ 없는 한국디자인산업〓색채 전문가들은 국내업체간 색채 표준화가 이뤄지지 않아 가전과 자동차 등 주요 기업간 색채정보 교환에 큰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색채분류기준이 업체마다 달라 서로 호환이 되지 않는데다 협력업체에 제품을 주문할 때도 원하는 색채 샘플을 정확하게 제시하지 못해 자금과 시간낭비가 심하다는 것.

한국색채연구소가 표준색 2천색을 규정했지만 업체마다 자기기준을 고집해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들이 이미 70여년전에 3천개 가까운 표준색을 코드화해 범국가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휴대전화가 바뀌면 충전기는 무용지물〓새 모델이 1년만에 ‘골동품’ 취급을 받는 휴대전화의 경우 충전기 규격화가 안돼 모델을 바꾸면 멀쩡한 충전기도 무용지물이 된다. 매출이 줄 것을 우려한 납품업체들이 표준화에 반대하고 있기 때문. 이 바람에 소비자들은 휴대전화를 교체할 때마다 충전기값으로 2만∼3만원씩을 더 내야 하고 국가적으로는 불필요한 충전기 제조로 헛돈을 날리고 있는 셈이다.

▽분류기준 애매한 물류〓야채 청과 생선 정육 건어물(생식품 5개 품번)과 일부 공산품 등 유통업체 취급상품의 분류 기준도 제각각이다. 달걀의 경우 일부 업체는 야채에 포함시키고 다른 업체는 ‘닭에서 나온 제품’이라며 정육으로 취급한다.

유통과정을 전산화하려 해도 업체마다 제품 분류기준이 달라 공동 주문과 공동분류가 불가능해 물류비용만 낭비되고 있다. 제조업체도 판매정보가 정확해야 적정 생산량과 적정가를 매길 수 있지만 코드가 통일돼 있지 않아 애를 먹고 있다.

▽치수 등급기준 대혼란〓의류의 경우 워낙 아이템이 다양하고 표준화된 가격체계도 없어 바코드나 치수가 업체의 ‘선택항목’처럼 간주된다. 여성 의류들은 4.3, 5.5 사이즈로 분류가 되는 데 비해 티셔츠 종류는 90,95,100 사이즈나 M, L, XL 등으로 크기를 표시하곤 한다.

정육은 시장에서 1,2,3등급으로, 백화점에선 중등급 상등급 특상등급으로 명칭이 바뀌기 때문에 소비자들은 늘 속아 사는 기분이다. 생선도 대충 크기에 따라 대 중 소로 나눠 팔지만 구체적인 기준이 없기는 마찬가지. 갤러리아백화점이 최근 생선을 무게 기준으로 팔기로 했고 현대백화점도 올 2월 굴비를 길이로 팔기도 했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유통점에서 제품 등급 분류는 ‘업자의 재량’에 속한다.

전경련 관계자는 “정부는 구조개혁의 가시적 성과를 내는 것도 좋지만 표준화와 같은 산업 네트워크를 정비하는 데도 신경써야 한다”고 말했다.

〈박래정·이 훈기자〉eco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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