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통령은 이날 최근의 대한항공 추락사건을 거론하며 “항공업은 우리 국민뿐만 아니라 외국인의 생명문제도 있기 때문에 단순한 사기업(私企業)으로 볼 수 없다”면서 건설교통부에 대해 전문경영인 체제로의 전환 대책을 세울 것을 강력히 지시했다.
이같은 지시가 나오자 재계 일각에서는 즉각 “대통령의 말씀은 법 위에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원칙을 강조해온 김대통령이 개별기업의 족벌경영 체제의 문제점을 거론하며 경영권 포기를 요구한 데 대해 재계가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
이 발언의 파장을 의식한 듯 박지원(朴智元)대통령공보수석비서관은 대통령의 발언 직후 서둘러 “사기업에 대한 간섭이 아니라 건교부에 주의를 환기시킨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김대통령이 “정부가 체면치레로 제재를 하니 (기업이) 아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고 언급한 대목 등을 감안할 때 이날 발언은 단순한 경고 이상의 의미를 지닌 듯하다.
특히 우리 정치문화적 특성상 대통령의 말 한마디는 구체적 법조문 이상의 힘을 갖기 때문에 자칫 대응을 잘못했다가는 향후 대한항공의 존폐로 직결된다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기도 하다.
사실 최근의 분위기로 볼 때 김대통령이 재벌개혁에 배수진을 쳤다는 것은 이미 공지의 사실. 14일의 청와대 월례 기자간담회에서 구조조정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재벌에 대한 최후통첩성 경고발언을 한 데 이어 이날 대한항공 문제를 거론한 것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김대통령이 굳은 각오로 재벌개혁에 박차를 가하게 된 것은 더이상 재벌총수들을 믿을 수 없다는 불신감 때문인 듯하다. 여기에는 최근 김대통령이 재벌총수들이 구조조정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는 얘기도 청와대 주변에서 나돈다.
여권의 핵심관계자들에 따르면 재벌의 정보책임자들은 올해 초 그룹 총수들에게 김대통령의 나이와 내각제 개헌, 내년의 16대 총선 등 정치일정을 감안할 때 구조조정을 하지 않고 버티면 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으며 여권이 정보채널을 통해 이를 입수하게 됐다는 것.
이 때문에 여권은 최근 몇달간 빅딜이나 구조조정에 이렇다할 성과가 나오지 않은 것도 이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는 것 같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김대통령은 재벌총수들이 청와대에 들어와 조속한 구조조정을 약속하고서도 돌아서면 딴소리를 하는 것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김대통령이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성과없이 5대재벌을 만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한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여기에다 재벌개혁을 늦출 경우 권력누수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국가신인도에도 문제가 생긴다는 위기의식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 재벌개혁이 더디게 진행되면서 국민 사이에서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다”는 불만이 터져나오자 여권핵심부는 이를 심각하게 여겨왔다.
더구나 평소 정부의 재벌 및 경제개혁에 대한 외국언론의 논조를 꼼꼼히 챙겨온 김대통령은 이를 늦출 경우 대외신인도 하락에 의해 또다시 경제위기가 올 수 있다는 점을 절감한 듯하다.
설혹 김대통령의 의지가 그렇다 해도 이번 대한항공 관련 발언의 경우는 그 파급 영향이 심대하리라는 게 재계의 지배적 반응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족벌경영이 문제가 되고 있긴 하지만 경영권 포기문제는 해당기업의 주주와 이사회, 고객의 이탈 여부 등으로 결정할 사항”이라며 “대통령의 초법적인 지시는 시장경제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렇지 않아도 재계에서는 김대통령이 취임 이후 5대그룹 간 빅딜과 구조조정을 추진하면서 수시로 재계 총수를 청와대로 불러 협조를 요청하는가 하면 공정거래위원회나 주거래은행 등을 통해 직접적인 압력을 가했다면서 불만을 표시해온 터다.
재계의 관계자는 “개별기업에 대한 대통령의 간섭은 족벌경영의 폐해만큼이나 한국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양기대·이영이기자〉k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