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20, 30대 이직열풍/"대기업 평생직장 아니다"

  • 입력 1999년 10월 3일 19시 58분


LG그룹 계열사 전산팀에서 근무하던 L대리(33)는 지난달 인터넷 관련 외국계 회사로 직장을 옮겼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에서 연봉 2500만원 이상을 받는 자리였지만 좀더 비전있는 새직장에서 ‘제2의 인생’을 설계하기로 한 것. 본인은 직장을 옮긴 이유를 “대기업은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무대로서 적당치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L씨가 새롭게 둥지를 튼 회사는 인터넷 광고대행 회사. 물론 연봉도 먼저 회사보다 많지만 개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졌다는 게 그에게는 더 큰 매력이다.

▼자기계발-비전 찾아▼

▽세차게 부는 이직열풍〓요즘 국내기업에는 L씨 또래인 20,30대의 직장 옮기기 바람이 불고 있다. 경제위기를 경험한 뒤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지면서 나타나는 새로운 현상이다. 기업에 대한 가치관이 바뀌고 개인별 자기계발을 중시하는 경향이 확산되면서 ‘더 좋은 기회’를 찾아 떠나는 이직붐은 앞으로 더욱 확산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전망한다.

▼경력자 선호풍토 한몫▼

경기가 회복돼 새로운 일자리가 늘고 기업마다 경력자를 선호하는 풍토가 자리잡은 것도 직장인들이 ‘이직카드’를 쉽게 꺼내게 하는 요인. 특히 인터넷 등 정보통신 붐을 타고 창업이 늘면서 우수인력을 확보하려는 업체별 고액연봉 경쟁도 이직열풍을 부추기고 있다.

▽‘대기업, 더이상 최고 직장이 아니다’〓LG그룹의 정보통신 계열사에서는 올들어 200여명이 사표를 제출했다. 이 회사 인사팀은 올해 말까지 전체사원의 10%인 360여명이 회사를 그만두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경영악화로 자동차에서만 관리직이 500명 정도 이탈한 대우그룹 외에 경영상태가 좋은 다른 그룹에서도 이직률은 환란 이전보다 두 배 가까이 높다. 5대그룹 정보통신관련 계열사에서는 올들어 업체별로 평균 100명 안팎이 회사를 떠났다.

대기업이 도전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더이상 의미를 주지 못한다는 게 일반적인 분위기. 비전있는 중소기업이나 벤처기업이 오히려 성취욕을 더 만족시켜준다고 이들은 말한다.

▼유망직장 문의 쇄도▼

주식 제공이나 스톡옵션을 조건으로 ‘뜰 만한’ 중소기업이나 벤처기업으로 옮긴 사례도 많다. 한화그룹 계열사에 근무하다가 스톡옵션을 제의받고 벤처기업 ‘인터넷사람들’로 자리를 옮긴 K씨(35)는 “전망있는 벤처기업에서 성공할 경우 많은 돈을 벌 수 있으며 실패하더라도 다른 회사에 경력사원으로 또 옮기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이직열풍으로 헤드헌트업체 호황〓고급인력의 집단 탈출현상으로 인력을 알선하는 헤드헌트 업체들은 호황을 누리고 있다. 업체별로 매달 200∼300명의 이직 신청이 접수될 정도. 유니코서치의 유순신상무는 “자세한 이력과 경력을 제시하면서 보다 나은 조건으로 근무할 수 있는 직장을 찾아달라는 문의가 최근 급증하고 있다”고 전했다.

예전에는 헤드헌트업체에서 대기업 주요 부서에 근무하는 사원에게 전화를 걸어 이직을 권유하면 전화를 끊어버리는 것이 예사였지만 요즘에는 오히려 질문공세를 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업계 관계자들은 입을 모았다.

〈김학진·박정훈기자〉sunshad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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