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같은 주장은 재벌의 차입경영에 의한 과잉투자와 총수중심의 기업지배구조 등을 외환위기를 초래한 주범으로 지목하고 ‘재벌은 악(惡)’이라는 도식아래 사실상의 재벌해체를 겨냥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개혁방향을 감안할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재벌해체 이후 ‘21세기에 한국을 먹여살릴 새로운 산업’에 대한 투자와 경영을 이끌어갈 주체가 누가될 지 청사진이 전무한 상황에서 경청해야 할 대목이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
여권일각에서도 최근 한진그룹 세무조사 등과 같이 어느 재벌이나 걸려들 수 있는 징벌식 재벌개혁을 반성하고 보다 미래지향적인 재벌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차츰 힘을 얻고 있다.
타룬 칸나, 크리시나 팔레푸 등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들은 세계적 경영학 잡지인 격월간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7,8월호에서 ‘신흥시장의 비즈니스그룹을 해체해야 한다’는 서구 금융전문가들의 주장은 이들 국가에서 앞으로도 상당기간 금융시장의 낙후성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시기상조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서구 금융전문가들이 한국의 삼성 대우그룹, 인도의 타타그룹, 터키의 콕그룹과 같은 비즈니스그룹으로 하여금 자산을 덜어내도록 부추기고 있다”며 이런 충고가 비록 선의에서 나온 것이라 할 지라도 논리적인 결함이 있음을 지적했다.
즉 기업이 핵심분야에 집중토록 하기 위해 비즈니스그룹을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서구 선진국에서 효율적인 투자자원배분 역할을 맡고 있는 수많은 투자은행과 경영대학원 등이 그리 쉽게 만들어질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
이들은 “신흥시장의 비즈니스그룹은 그동안 투자은행이나 경영대학원 등 소프트 인프라의 미발달로 생겨난 공백을 채워왔다”며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기존 사업의 자본과 인력을 이용함으로써 벤처회사와 같은 매개자 역할을 한 대우그룹이나 인력개발원과 해외근무 경력 자체가 하나의 MBA코스였던 삼성그룹의 사례를 제시했다.
칸나와 팔레푸 교수는 “비즈니스그룹이 해체된다면 서구에서 당연시하는 소프트 인프라를 제공할 수 있는 어떠한 제도도 남지 않게 될 것”이라며 “부적절한 시기에 비즈니스그룹을 해체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비즈니스그룹의 사업다각화와 관련해 “기존사업에 대한 지원과 새로운 벤처사업에 대한 지원은 구별할 필요가 있다”며 “기본사업에 대한 자금지원은 점차 자본시장에 맡기도록 개선해 나가되 자본시장이 발달하기 전까지는 새로운 벤처사업을 지원하는 등의 특정역할은 좀더 지속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앨런 그리스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장도 최근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IBRD) 합동세미나 연설에서 “금융위기를 맞은 아시아 신흥시장에서 거의 모든 금융활동이 은행에 집중돼 있고 이를 대체할 만한 시장이 없다”며 다양한 자금시장 등 소프트 인프라 구축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주로 협소한 자본시장구조를 갖고 있는 나라에서 금융위기가 집중적으로 발생한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며 “미국에서도 90년 금융권의 신용경색으로 기업들이 자금조달에 애를 먹었으나 결국 다양한 금융구조로 폭풍을 잠재운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스펀 의장은 “일본이 여전히 경제회복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은행외에 기업자금창구의 대안이 없기 때문”이라며 “반면 호주의 경우 금융위기를 맞은 동남아와 경제교류가 많았으나 발달된 금융시장때문에 동반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송평인기자〉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