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처럼 선진권의 경험과 고언(苦言)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 정부와 기업인들은 처음 봤다.’
헨리 키신저, 리콴유 등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위촉한 11명의 해외자문단은 3일 동안 계속된 ‘99서울경제포럼’을 마친 뒤 23일 폐막 기자회견에서 한국에 대해 △지속적인 개혁이 필요하며 △기업경쟁력을 높여야 하고 △‘성숙한’ 세계화가 필요하다고 충고했다.
자문단은 외환위기 이후 한국이 선택한 영미식 경제운용 모델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사토 미쓰오 전아시아개발은행 총재 등 일부 참석자들은 ‘맹목적인 미국 추종’이라고 우려하기도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내용.
―대우그룹의 좌초 이후 한국인들 사이엔 ‘글로벌화 때문에 망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진정한 글로벌 전략은….
“(퍼시 바네빅 ABB이사회 의장)30여년간 한국의 성공비결은 공격적인 수출이었다. 외국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시장을 공략하는 전략이다. 이제 이 전략은 수정되어야 한다. 기업의 투명성을 높이고 외국기업의 지분참여를 받아들여야 한다. 또 한두 분야에서 세계 최고가 돼야 한다. 모든 제품에서 세계 50위를 하는 것보다 1, 2개 품목에서 세계 수위를 다투는 것이 낫다. 미래엔 부가가치 산업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한국의 고유문화를 지키되 세계 문화를 배워야 한다. 젊은이를 해외에 보내 미래를 준비하도록 해야 한다. 한국인이 아니라도 기업활동에 참가할 수 있어야 세계화에 뒤지지 않는다. 볼보자동차는 포드와 손잡아 자동차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 15위에서 2위 기업이 됐다.”
―동북아에서 중국이 급부상하면서 일본의 역할에 관심이 쏠려 있다. 일본의 핵무장 가능성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리콴유 전싱가포르총리) 일본은 미일 안보협정에 따라 재래식 무기로는 미군을 지원할 수 있다. 그러나 핵무장 결정을 내린다면 아시아권의 국가질서가 재편돼야 하며 우려할 만한 일이 된다. 최근 일본의 방위청차관이 핵무장 지지발언을 했는데 (사퇴하는 것을 보니) 일본인 대부분은 그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다.”
―대우그룹 처리에 대해 채권자 입장에서 조언해달라.
“(오노 루딩 시티은행 부회장) 금융시장 안정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만 현재의 금융시장 불안정이 전적으로 대우 탓만은 아니다. 대우문제는 빠른 시일 내에 대우 정부 채권자간의 합의를 바탕으로 처리해야 한다. 대우 해외채권단 중 일부는 대우에 불리한 결정을 내리려 하고 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을 줘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다. 국내외 채권단의 합의가 중요한데도 국내채권단과 정부는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 시간을 허송했다.”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도 ‘아시아적 가치’를 주장한다. 리콴유 전총리의 주장과 다른 점은….
“(리콴유) 김대중대통령과의 논쟁이 관심거리가 된 것 같다. 70대 중반을 넘긴 사람들의 생각이 하루 아침에 바뀔 수는 없다. 누가 맞는 지는 역사가 검증해줄 것이다. ‘포린 어페어’와의 인터뷰 중 아시아의 ‘4마리 호랑이’의 성공배경을 설명하면서 유교적 가치관의 유용성에 대해 언급했다. 이를 서구언론이 ‘아시아적 가치’로 보도했지만 사실 아시아에는 다양한 가치가 공존한다. 마하티르의 아시아적 가치는 종교(힌두교)적 성격이 가미된 것 같다.”
―같은 아시아 국가들끼리도 발전에 격차가 있는데….
“(리콴유) 아시아권의 발전격차는 사실 가치관이 아닌 시스템의 문제다. 한국과 대만은 일본의 영향을 받았고 홍콩과 싱가포르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탓에 기업 투명성과 공정경쟁 기회균등에 익숙했던 것뿐이다. 더욱이 외환위기에서 대만은 대기업이 적고 미국화된 기업이 많아 충격이 적었지만 한국은 고스란히 당했다. 한국에 ‘밖을 바라보라’고 제안하고 싶다. 일본은 과거 독특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것은 이제 세계화에 장애가 된다. 외국과 손을 잡아야 하는데 독특성은 방해가 된다. 한국인들이 외국인과 손을 잡는 것도 세계화이다.”
―이번 포럼에서는 일본 경제모델이 적당치 않다는 지적이 많이 나왔다. 일본 전문가로서 동의하는가.
“(사토 미쓰오)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일본은 최대의 자본수출국이고미국은최대의자본수입국이다. 일본은 세계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고 아직도 견실하다. 내년엔 경제성장률이2%대로회복될것이다.”
“(공동 기자회견이 끝난 뒤 별도 기자회견에서 사토 미쓰오) 이번 외환위기는 동서양 문화를 어떻게 조화롭게 수용할 것인가라는 중요한 숙제를 남겼다. 아시아인들은 ‘타인의 약점을 가지고 돈을 버는 행위가 허용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됐다. 물론 구미의 뛰어난 경영과 기술 등은 배워야 한다. 그렇다고 아시아적 가치를 폐기할 이유는 없다. 아시아국가들은 자주 교류하면서 아시아적 가치와 정체성(正體性)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야 한다.”
〈박래정·박정훈기자〉ecopark@donga.com
참석자들의 종합토론 내용은 마이다스동아일보(www.donga.com)의 ‘이코노미클럽’에 전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