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치금융 망령]당국 지나친 개입등 영향 돈이 안돈다

  • 입력 1999년 12월 15일 19시 42분


채권딜러 A씨는 13일 1조3000억원 규모의 외국환평형기금채권 입찰이 실시되기 직전 정부 관계자로부터 “연 7% 이상을 써내면 곤란하다”는 ‘당부성’ 전화를 받았다.

외평채를 이보다 낮은 금리로(비싸게) 인수하려면 입찰에 참여하고 그렇지 않을 요량이면 포기하라는 것.

낙찰금리가 너무 높으면 시장금리를 한자릿수로 유지하는 데 어려움이 생긴다는 논지였다. 결국 이날 3개월만기 외평채의 가중평균 낙찰금리는 연 6.97%.

A씨는 “이익을 추구하는 금융기관에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채권을 비싸게 사라고 요구하는게 말이 되느냐”며 “한동안 사라진 듯했던 관치금융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고 개탄했다.

▽시장의 목을 죄는 관치금융〓대우사태 이후 급등했던 시장금리는 이달들어 3년만기 회사채가 연 9.7%선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는 등 이례적으로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

금리체계가 지나치게 질서정연한 것은 금융당국의 과도한 개입이 자금거래 심리를 극도로 위축시켰기 때문이라는 분석. 일각에서는 현 시장금리가 정부 또는 정부의 대리인인 채권안정기금이 인위적으로 묶어놓은 것이라는 점을 들어 ‘관제(官製)금리’라고 꼬집는다.

채권딜러 B씨는 “매일 금리종가를 산출할 때면 채권기금측에서 실제금리보다 낮은 ‘권장금리’로 써낼 것을 요구한 적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자금시장은 개점휴업〓대우사태 이후 투신권과 은행 신탁계정에서 뭉칫돈이 빠져나가면서 채권 매수세력이 실종된데다 채권안정기금이 무리한 시장개입을 단행하면서 연말 자금시장은 거래가 뚝 끊겼다.

9월 중순경 하루 평균 2조원을 웃돌던 거래액이 최근 10%에 불과한 2000억원대로 줄었고 시중은행의 하루 거래성사 건수는 10여건에 불과한 실정.

거래가 안되는 가장 큰 이유는 금융당국이 설정한 지표금리와 참가자들이 느끼는 체감금리간의 큰 격차 때문.

예컨대 채권을 사려는 측은 3년만기 회사채의 경우 연 10%초반, 국고채는 9.1%는 돼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당국은 이보다 0.4%포인트 가량 낮은 선으로 억누르고 있다.

이에 따라 자금거래가 단기채권이나 초단기 콜 위주로 집중되면서 시중에 돈은 넘쳐도 이 자금이 기업으로 흘러들지 못하고 금융권 주변만 맴도는 기현상이 초래되고 있다.

한국금융연구원 최공필(崔公弼)연구위원은 “저금리를 통한 금융시장 안정이 필요하긴 하지만 시장원리가 무시되는 상태가 지속되면 자금을 꼭 필요한 곳에 공급하는 금융기능이 마비돼 실물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리게 된다”고 경고했다.

〈박원재기자〉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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