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그룹의 계열사별 독립경영이 확산되면서 ‘계열사 봐주기’의 오랜 관행이 허물어지고 있다. ‘한 집안 식구’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봐주던 종래의 행태는 갈수록 보기 힘들게 됐다.
계열사별로 철저한 실적 평가제가 더욱 강화되는 추세여서 계열사간 ‘형제애’는 앞으로 점점 옅어질 것으로 보인다.
삼성물산은 올해 초 수주한 2억달러 규모의 가나 정유공장 건설 프로젝트의 시공을 SK건설에 맡겼다. 같은 물산 내에 건설부문이 있는데도 다른 회사에 넘긴 이유는 단 한가지. 여러 조건을 따져본 결과 그쪽에 맡기는 편이 이익이 더 많이 남기 때문이었다.
삼성물산은 크로아티아 시삭 제철소를 수주하는 과정에서도 현대그룹 계열의 현대정공과 공동으로 참여했다. 이 분야에서 최고의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는 회사를 찾다보니 현대정공으로 결론이 내려졌다는 것.‘현대 계열사인데…’라는 고려는 전혀 끼어들지 못했다.
‘정글의 법칙’이 오래전부터 자리잡은 광고업계에서는 최근들어 이같은 경향이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LG전자는 자사 대형냉장고 디오스의 광고를 계열사인 LG애드가 아닌 웰컴에 맡겼다.
두산의 카프리맥주 광고 대행사 역시 두산 계열사인 오리컴이 아닌 웰컴. 재벌그룹 계열 광고회사들은 지금까지 자사 그룹 광고물량은 ‘따놓은 당상’으로 취급하며 쉬운 장사를 해왔으나 갈수록 치열한 경쟁체제를 절감하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최근 4000억원 어치의 현대전자 주식을 매각해 주가가 떨어진 현대전자 직원들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야 했다.
현대중공업의 한 임원은 “그동안 우리회사가 그룹의 금고 역할을 하면서 돈이 좀 모일 만하면 계열사를 지원하는 데 썼지만 앞으로는 철저히 실속을 챙길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중공업은 최근 투자자들 앞에서 “앞으로는 다른 계열사의 실권주 인수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기업마다 ‘자사이익 경영’을 앞세우다보니 그룹과 마찰을 빚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최근 한 재벌그룹 계열 건설회사는 공기업이 발주한 공사에 대해 법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다 그룹의 지적을 받았다. 이 회사 대표는 “그룹 이미지도 있고 하니 억울하더라도 참아라”는 그룹의 뜻을 어기고 주장을 꺾지 않아 그룹측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계열사간에 돈을 빌려주는 관행도 사라지고 있다. 증권거래소에 따르면 올들어 계열사간 자금지원 규모는 작년에 비해 80%나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이명재기자〉mj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