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이 살아야 금융이 산다]헝클어진 메커니즘

  • 입력 2000년 2월 13일 19시 34분


《금융시장이 2월 8일 대우채 환매라는 ‘발등의 불’을 끄고 안정을 되찾았다. 대우사태 이후 닥친 몇 차례의 위기를 큰 혼란 없이 극복한 데는 정부의 주도면밀한 대책이 나름대로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 하지만 시장의 자율조절 기능이 무시되는 사례가 되풀이되면서 금융시장 메커니즘이 붕괴됐다는 비판론도 나오고 있다. 시장 메커니즘의 복원을 가로막는 요인은 무엇인지, 해결방안은 없는지 등을 3회에 걸쳐 긴급 진단한다》

작년 7월 대우사태 이후 극도로 불안한 모습을 보였던 자금시장은 새해 들어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정상을 되찾았다. 채권시장의 기능이 회복돼 자금거래가 비교적 순조롭고 콜금리 인상에도 불구하고 장기금리는 하향 안정세를 보인다.

하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시장 구석구석엔 ‘관치’의 흔적이 뚜렷하고 시장참가자들은 여전히 무기력한 표정. 한 채권딜러는 “대우사태 이후 정부 주도의 응급처방이 반년 넘게 지속되면서 시장메커니즘은 완전히 망가졌다”고 성토했다.

▼"심기 거스르면 안좋다"▼

▽정부 눈치봐야 돈번다〓최근 일부 금융기관이 대우채 환매자금을 유치하기 위해 수신금리를 올리자 금융감독위원회는 은행 증권 보험 등 6개 금융협회장 회의를 소집해 엄포를 놓았고 금리는 곧바로 원상회복됐다. 작년 가을에도 한 시중은행이 투신권 이탈자금을 겨냥해 정기예금 금리인상을 발표했다가 금융당국의 불호령에 슬그머니 철회했다. 금리를 올리는 행위가 칭찬받을 만한 것은 아니지만 당국이 개별 금융기관의 금리까지일일이 간섭하고 나선 것은 우리 금융의 후진성을 여실히 드러낸 사례.

한자릿수 금리에 대한 당국의 집착은 시장 참가자들의 자율적인 거래를 막고 “정부 심기를 잘 헤아려야 유능한 딜러”라는 이상한 풍조를 유포시켰다.

채권안정기금도 시장시스템을 헝클어뜨린 주범으로 꼽힌다. 금리를 낮추기 위해 실제 거래가보다 훨씬 비싼 값(낮은 금리)으로 채권을 사주는 게 당연시되면서 참가자들은 정교한 시장전망을 토대로 합리적인 매매전략을 세우기보다 당국의 기류를 살피는 데만 골몰했다. 삼성생명투신운용의 한 간부는 “경제논리에 따른 거래패턴이 정착되지 않는 한 정부의 거창한 채권시장 육성대책도 효력을 발휘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당국이 '도덕적 해이' 부추겨▼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의 팽배〓금융시장 안정이라는 명분에 지나치게 얽매인 탓에 당국이 오히려 모럴 해저드를 조장한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금감위가 사실상 기획과 판촉에 깊숙이 끼어든 하이일드펀드의 시판과정이 대표적인 예. 투기등급채권에 투자하는 대신 공모주 우선배정 등의 혜택을 부여한 이 상품은 투신권이 보유중인 비우량채권의 수요를 늘려 유동성 공급을 늘리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기대수익률이 높은 만큼 투자위험도 크고 그런 점에서 ‘하이리스크 하이일드’ 펀드라는 명칭이 적합하지만 금감위 간부들은 이 펀드에 공개적으로 가입하면서 개인들의 투자를 유도했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투자자를 보호해야 할 책무가 있는 감독당국이 오히려 리스크가 큰 상품 가입을 권유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난센스”라고 꼬집었다.

채권안정기금도 금리안정 공적과는 별개로 채권딜러들에게 모럴 해저드를 확산시킨 책임을 져야 한다는 지적. 일부 딜러들은 “금리가 뛰면 채안기금이 어김없이 사주니까 금리변동에 따른 보험에 든 셈이고 설령 손해가 나더라도 ‘당국이 개입하는 바람에 생긴 일’이라는 핑계거리가 생겼다”고 털어놓았다.

▼"일단 고비만 넘기고 보자"▼

▽땜질식 처방 악순환 끊어야〓한국금융연구원 최공필연구위원은 “단기적 위기대응 능력은 세계 1위지만 눈앞의 성과에 만족하는 동안 금융시스템은 오히려 골병이 들었다”고 개탄했다. 유동성 위기 때마다 눈앞의 고비만 넘기고 보는 방식에 의존하면서 완전진화의 기회를 놓친 채 불씨를 계속 키우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것.

돈 가뭄이 극심하던 98년 초 종금사들의 현금이 바닥나 기업어음(CP)이 제대로 할인되지 않자 연 20%대의 고수익이 가능한 은행 신종적립신탁이 도입됐고 작년 4월 이 상품의 만기가 다가오자 은행신탁의 유동성 부족을 메울 대안으로 단위금전신탁이 등장했다. 이제 은행들은 두달 뒤 단위금전신탁에 가입한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상황을 걱정하고 있다. ‘개별 금융권의 유동성 부족→신상품 도입→자금 유입으로 1차 위기 해결→만기도래 →자금대거 인출로 2차 위기발생→또 다른 신상품 등장’의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최연구위원은 “땜질식 처방으로 지금 당장 시장 전체의 기능이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장기적으로 자금분배의 효율성을 떨어뜨려 실물경제에 부담을 주게 된다”며 “부실 처리 대가로 시장메커니즘을 희생시키는 악순환을 과감하게 끊어야 금융의 자생력이 살아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원재기자>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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