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소비자파워]日 '제조물책임법' 소비자-기업 만족

  • 입력 2000년 2월 14일 19시 31분


113년 역사의 코카콜라사는 지난해 창립이후 최대 시련을 겪었다. 불량제품을 마신 소비자들의 복통사고가 각국에서 있따랐으나 코카콜라사는 “제품에 아무 문제가 없다”며 리콜을 거부, 유럽 각국 소비자들의 불매운동을 자초했던 것. 상황이 심각해지자 코카콜라사도 결함있는 이산화탄소의 사용과 비위생적 수송과정을 인정하며 대응책을 강구하고 나섰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매출이 수십억달러 감소한 것은 물론 미국 경제의 전반적 호황에도 불구하고 주가는 연말까지 계속 곤두박질쳤다.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는 이처럼 ‘눈앞의 작은 이익’을 좇아 소비자권리를 무시하는 기업이 파산 위기로까지 내몰리는 사례가 적지 않다.

반면 미국의 제약회사인 존슨 앤드 존슨의 ‘타이레놀사건’은 ‘소비자 지향적인 기업이 성공한다’는 평범한 진실을 여실히 증명한다. 80년대 존슨 앤드 존슨사가 발매한 진통제 ‘타이레놀’ 캡슐에 누군가 청산화합물을 섞어 넣어 소비자 8명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자사 과실이 아니었지만 존슨 앤드 존슨사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제품을 즉각 회수한 뒤 제품에 독극물을 넣을 수 없도록 1주일만에 모든 제품을 정제(錠劑·알약)로 바꿨다. 여기에 들어간 비용은 약 1억5000만달러.

하지만 이 회사의 소비자 지향적인 자세는 소비자에게 깊이 각인돼 이후 이 회사의 매출실적은 비용을 상쇄할 만큼 크게 늘었다.

아직 국내에서는 이처럼 소비자가 기업의 흥망을 좌우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만큼 기업과의 관계에서 소비자의 ‘파워’가 약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구매한 제품에 하자가 있을 경우 환불이나 제품교환 등 기본적인 소비자권리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국내기업들이 관행적으로 소비자의 피해나 불만사항을 덮기에 급급한데다 소비자 권익을 뒷받침할만한 제조물책임법(PL법)과 대표소송제 등의 법제도가 미비한 때문이다. 또 30여년 동안 ‘기업육성’이라는 미명 아래 소비자보다는 기업 위주로 경제시스템이 운용돼 온 것도 주요한 이유다.

실제로 지난해 9∼10월 가전업계와 화장품업계의 유통실태를 조사한 경실련은 일부 대기업이 독과점적인 시장지위를 이용, 엄청난 폭리를 챙겼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경실련은 “수십년 동안 소수 대기업이 시장을 장악해 품질과 가격 경쟁 등을 피하며 막대한 부당수익을 챙겨 왔다”면서 “열악한 국내 소비자의 지위는 이처럼 경제구조적 측면이 강하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지난해말 국회를 통과한 PL법이 2002년 7월 시행되면 국내 소비자의 지위도 휠씬 강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PL법은 소비자가 가공 공산품으로 인해 재산 및 신체상의 피해를 보았을 경우 소비자가 제조업자의 고의나 과실을 입증해야 했던 책임을 크게 완화, 피해보상을 쉽게 하는 것을 뼈대로 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국내기업들은 ‘소비자권리 보장을 위한 기본법’인 PL법 도입에 난색을 표시하고 있다. ‘소송 봇물’에 휘말려 파산하는 기업이 속출할 수 있고 품질관리 비용 등이 급증해 큰 부담이 된다는 것.

그러나 미국 유럽연합(EU) 일본은 물론 러시아 중국 필리핀 등 30여개 국가가 이미 시행중인 PL법의 도입은 피할 수 없는 세계적 추세다.

95년부터 PL법을 시행해 온 일본의 사례도 소비자 지위의 향상이 기업에 결코 손해가 아니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법시행 뒤 일본에서 PL법에 근거해 제기된 소송은 모두 18건. 이는 소송을 싫어하는 일본의 국민성과도 상관 있지만 일본 기업의 품질관리 강화 및 제품안전성 제고 노력, PL센터 등을 통한 기업들의 자발적인 피해구제 노력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일본 도쿄(東京)도 미나토(港)구에 위치한 가전제품 PL센터. 일본 업계가 PL법 시행 후 소비자 불만사항을 공동 처리하기 위해 자동차 생활용품 등 12개 분야별로 설립한 센터중 하나다.

이 센터의 오이시바시 도루(大石橋徹·52)사무총장은 “연간 2000여건의 각종 피해사례가 접수되지만 1, 2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당사자간 합의나 센터의 조정과 중재로 원만하게 해결된다”며 “‘PL법은 기업을 망하게 한다’는 당시 일본 기업들의 우려는 기우였음이 드러났다”고 말했다.

일본소비자관련전문가회의(ACAP)의 우스다 다카시(薄田隆·53) 사무국장은 “PL법 도입후 기업들이 제품의 안전성을 크게 강화하고 고객상담실 인력을 대폭 늘리는 등 소비자피해에 즉각 대응하고 있다”며 “소비자의 불만사항을 제품생산에 충실히 반영해 품질이 향상되고 소비자의 신뢰감도 크게 높아졌다”고 변화상을 소개했다. 일본은 지난해 소비자가 기업의 과실이나 잘못을 입증하기 쉽도록 소비자의 기업정보 접근권을 강화한 ‘문서제출 명령제도’를 제정한데 이어 최근 소비자계약법 제정을 서두르고 있다.

PL법이 제조물의 결함으로 인한 소비자피해를 구제하는 법이라면 소비자계약법은 부당한 기업 서비스와 계약상의 문제로부터 소비자를 보호하게 된다. 이 법이 시행되면 소비자는 계약내용이 기업에 일방적으로 유리할 경우 이를 무효화할 수 있는 등 소비자권리가 크게 강화된다. 갈수록 급증하는 통신판매 방문판매 등의 부작용에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PL법과 함께 소비자권리 보호를 위한 ‘쌍두마차’인 셈이다.

최근 선진국 기업들은 소비자 불만해소 차원을 넘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예를 들어 10여년 전부터 폐기물처리와 에너지절약 등 환경보전 분야에 대한 투자비용과 효과를 금액으로 표시하는 환경회계를 도입한 IBM 등에 이어 최근 후지쓰 소니 마쓰시타전기 등 일본기업들도 이를 속속 도입하고 있다.

최병록(崔秉祿·서원대 교수·민법학)PL법연구원장은 “소비자의 권리를 강화하기 위해 PL법 외에 대표소송제와 기업의 정보공개제도도 도입해야 한다”며 “이와 함께 기업경영자들이 소비자 권리를 존중하는 마인드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소비자 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 강광파(姜光波·여)이사는 “소비자 의식이 크게 향상된 시대에 소비자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기업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며 “소비자들도 적극적인 고발과 조사활동, 불매운동 등을 통해 이 같은 사실을 현실로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터뷰/日 소비자관련 전문가회의 우스다 다카시사무국장▼

일본소비자관련전문가회의(ACAP)의 우스다 다카시(薄田隆·53)사무국장은 “기업은 소비자의 욕구와 불만을 충분히 수렴해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제공해야 한다”며 “이럴 경우 장기적으로 기업의 이익도 극대화된다는 점에서 양자가 추구하는 것은 같다”고 강조했다.

ACAP는 1980년 설립돼 현재 385개 회원사를 가진 단체로 소비자문제를 담당하는 기업관계자들의 조직.

―어떤 일을 하고 있나.

“회사원들끼리 소비자 대응 기술과 소비자관련 정보를 교환하고 연구하는 게 기본활동이다. 고객상담실 직원뿐만 아니라 최고경영자와 연구자, 제품설계자 등도 참여한다. 특히 각 회원사는 여기서 제공되는 각종 강좌와 세미나, 자주적 연구활동 등을 통해 유전자조작물질(GMO) 환경호르몬 등 최신 이슈들을 익혀 소비자 요구에 민감하게 대응하고 있다.”

―95년 PL법 시행 당시 기업들의 우려가 컸던 것으로 아는데….

“처음엔 소송이 늘까봐 업계에 위기감마저 감돌았다. 상대적으로 제품안전에 소홀했던 중소업체들의 위기감이 컸다. 그러나 시행 5년이 지난 지금 대부분 기업들은 안심하고 있다. 각 기업이 제품의 안전에 심혈을 기울여 PL법에 의한 소송건수는 그동안 18건에 그쳤다.”

―PL법이 잘 정착될 수 있었던 비결은….

“언론과 정부의 적극적인 홍보가 크게 기여했다. 또 기업들은 대부분 PL보험에 가입, 스스로 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 대형할인점이나 백화점 등 유통업체가 보험 미가입업체의 제품은 거래하지 않는 등 업체들에 보험가입을 강력히 요구했다. 기업들은 소비자 불만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 제품개선의 기회로 활용했다.”

―일본기업들은 소비자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나.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충족시키는 게 기업이 성공하는 비결이라는 공감대가 폭넓게 형성돼 있다. 또 소비자의 신뢰를 얻기 위해 손실을 무릅쓰는 기업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도요타는 프리우스라는 전기자동차를 생산하는데 잘 팔리지 않지만 환경친화적 기업이라는 신뢰를 얻기 위해 계속 생산하고 있다.”

<도쿄〓선대인기자>eodls@donga.com

▼한국은?/96년 리콜제 도입불구 자발적 실시 거의 없어▼

리콜은 제품 품질에 하자가 있을 때 실시되는 ‘소비자 보호제도의 꽃’.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정부기관이 업체에 리콜을 명령하기도 하지만 PL법이나 집단소송제를 도입, 기업들의 자발적 리콜을 유도한다. 따라서 선진국에서는 리콜 횟수가 많을수록 신뢰할 수 있는 기업이라는 인식이 크다.

우리나라도 96년 식품과 각종 소비재, 서비스상품 등에 대한 리콜제를 도입했으나 국내기업 대부분은 아직 리콜에 소극적이다.

특히 자발적인 리콜사례는 극히 드물다. 오히려 제품에 하자가 발생해도 숨기기에 급급하다.

국내기업으로는 96년 LG전자가 자사 ‘싱싱냉장고’의 냉각기능에 문제가 생겨 리콜을 실시한 것이 거의 유일한 사례. LG전자는 ‘리콜하면 소비자들이 제품에 큰 하자가 있는 것으로 인식, 매상이 떨어진다’는 업계의 ‘편견’을 깨고 과감히 리콜을 실시한 것.

LG전자는 이때 200억여원을 투입했으나 그 이상의 소득을 올렸다. ‘정직한 기업’ ‘책임경영을 하는 기업’으로 언론과 소비자단체로부터 극찬을 받았고 기업이미지가 크게 향상된 때문이다. 실제 이듬해인 97년에는 평년보다 높은 매출신장률을 기록했다.

한국소비자보호원에 따르면 96년1월∼97년5월 국산자동차업계의 내수용 자동차에 대한 정식 리콜건수는 단 한건. 자동차업계는 리콜 대신 14차례의 무상점검서비스 등을 통해 소비자의 불만을 무마했다.

반면 같은 기간 수출용차에 대해서는 모두 10차례 리콜을 실시했다.

리콜대상 차량의 비율도 수출용이 15.6%로 내수용 7%의 2배가 넘었다. 같은 기간 국내수입차량의 리콜건수는 모두 84건이었다.

소비자보호원 이남희(李南熙·40)과장은 “국내업계는 ‘리콜에 대한 소비자의 부정적 이미지’를 탓하며 정식 리콜을 피하려 한다”며 “그러나 시장개방에 따라 경쟁이 치열해지고 소비자 의식이 높아진 상황에서 기업들이 과거처럼 소비자 권리를 경시한다면 성공하기 힘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선대인기자>eodl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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