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마전' 재건축]당국 무책임/非理 눈감고…뇌물 챙기고…

  • 입력 2000년 3월 8일 19시 14분


서울 강남구 도곡동 주공아파트 재건축조합은 요즘 다른 재건축조합들을 도와주느라 눈코뜰 새 없이 바쁘다.

그동안 시공사에 ‘당했던’ 경험을 살려 유사한 피해를 보지 않도록 무료로 컨설팅을 해주기 때문.

이들은 시공사가 제시한 최초의 안을 법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방법과 조합에 불리하지 않도록 계약서 작성하는 방법 등을 다른 조합에 알려주고 있다.

생업에 바쁜 이들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재건축 현장에서 시공사의 횡포를 견제할 주체가 없다는 인식 때문.

도곡조합도 건설교통부 내 분쟁조정위원회에 8차례나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그 때마다 ‘사인간의 분쟁이므로 해결 권한이 없다’는 답변만 들어야 했다.

홍원용조합장은 “조합원들이 재건축 현실에 대해 너무 모르기 때문에 시공사가 마음대로 조합을 유린할 수 있는 것”이라며 “정부가 하지 않는다면 시민들의 힘을 모아 올바른 재건축 문화를 만들어 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사실 재건축 사업에서 발생하는 갖가지 잡음이나 시공사의 횡포에 대해 정부는 완전히 손을 놓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술 더떠 사업 인허가권을 가진 공무원이 시공사로부터 수천만원대의 뇌물을 받는 사례까지 있다.

▽무책임한 행정당국〓시공사의 횡포와 조합비리가 계속될 수 있는 것은 정부가 무관심과 방치로 일관했기 때문. 전문가들은 “시공사의 횡포가 만연해 있고 주민들의 민원도 많아 누구나 재건축 사업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지만 유독 정부만 ‘골치아픈 사인간의 분쟁’으로 치부해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고 성토한다.

당사자인 시공사와 조합에 문제 해결을 맡길 경우 법률적 경제적으로 상대적 우위에 있는 시공사가 유리할 수밖에 없게 된다.

건교부 관계자는 “재건축이 사안별로 조합과 시공사간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그동안 방치돼온 것은 사실”이라며 “조만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종합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공무원 뇌물관행도 지속〓재건축 현장에서 벌어지는 시공사의 횡포와 조합비리는 공무원의 뇌물수뢰에도 원인이 있다.

재건축 영업을 담당하는 A건설사 관계자는 “아파트 한 단지를 짓기 위해 허가관청인 구청에만 수천만원대의 돈이 들어간다”며 “고급 룸살롱에서 술을 사고 ‘2차’까지 내보낸 뒤 집으로 1000만∼2000만원을 배달해야 비로소 사업승인을 받을 수 있다”고 토로했다.

B건설사 관계자도 “공무원들은 ‘도와줄 수는 없어도 방해는 할 수 있다’는 말을 공공연히 한다”면서 “감사가 강화되는 명절이나 휴가철에는 ‘가급적 출입을 삼가라’는 전화까지 걸어온다”고 털어놨다.

공무원에게 건네진 돈은 결국 조합원들의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대안은 없나〓만연한 재건축 비리를 일소하기 위해서는 관련법을 정비해 잘못이 드러난 시공사에 대해서는 강력한 행정처분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조합과 시공사에 대한 관리 감독이 강화돼야 한다는 것이다.

참여연대 시민권리찾기 운동본부 김남근변호사는 “흩어져 있는 재건축 관련법을 정비하고 조합과 시공사간의 계약내용을 행정기관으로부터 인가받도록 해 사업이 투명하게 진행되도록 해야 한다”며 “검찰도 전담반을 구성해 신속하게 수사를 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조합원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관련지식을 익히는 일.

시공사나 조합집행부의 무리한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똑똑한 조합원’이 돼야 한다는 뜻이다.

대한주택공사 박신영연구원은 “재건축에 대한 환상을 깨고 수익성 등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재건축 관련지식을 익히는 것이 필수”라며 “떼돈을 벌겠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불쑥 도장을 내준 뒤에는 돌이킬 수 없는 고통만이 돌아올 뿐”이라고 강조했다.

<박정훈기자>sunshad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