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직후 ‘블랙박스’란 국제적 오명을 샀던 대기업 및 금융기관 회계장부를 투명하게 만들려는 일련의 조치들이다. 2년여에 걸친 ‘투명화작업’의 성적은 몇 점일까.
▽회계법인들, ‘존폐를 걸고 감사(監査)한다’〓회계감사 법인들의 자체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고영채 안진회계법인 부대표는 “강화된 회계기준이 실제 적용되는 것은 99년 회계장부를 결산하는 요즘”이라며 “기아자동차의 부실회계에 책임을 지고 청운회계법인이 해산한 뒤 감사인들은 잔뜩 긴장하고 있다”고 전한다.
안진처럼 한 파트너의 잠정 감사결과를 별도 파트너들이 추가 심리하는 내부견제 장치를 둔 곳도 나타났다. 상습적인 부실 진원지였던 각종 ‘평가항목’에서 감사인과 기업들간 줄다리기가 유례없이 팽팽한 것으로 전해진다.
▽‘회계제도 하드웨어는 갖췄지만…’〓그러나 감독 당국의 평가는 차갑다. 김종창(金鍾昶)금융감독원 부원장은 최근 “하드웨어(회계제도)는 선진권이지만 소프트웨어는 아직 멀었다”고 평했다. 김일섭 회계연구원 원장은 “강화된 규정을 적용하는 기업과 금융기관 및 투자자, 감사법인간 견제와 균형은 기대수준 이하”라고 지적. 실제로 98, 99년에 걸쳐 금감원이 ‘감사보고서를 감리한’ 결과 61건의 부실감사 사례가 지적됐다.
반면 ‘회계정보가 부실해 손해를 입었다’는 배상청구 건수는 IMF 이후 지금까지 10여건에 불과하다. 98년 4월 부도를 낸 H사의 경우 회계법인의 감사의견은 2년 전부터 ‘한정’이었지만 금융기관이 56억을 추가로 빌려주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벌어졌다. 견제장치가 작동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걸림돌들〓엄격한 회계관행이 뿌리내리지 못하는 데에는 정부의 ‘상황논리’도 한몫한다는 지적이 많다. 당장 3월 결산을 앞둔 증권 투신권의 대우채 손실을 ‘비용’으로 인정하려는 움직임이 도마에 오른 상태. 정부는 ‘대우채 환매를 정책적인 판단에 따라 강제한 만큼 비용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입장이지만 기업회계기준에 따르면 엄연한 손실이다. 손실을 비용으로 처리할 경우 각사별로 수천억원씩 수지개선 효과가 생겨난다.
소장파 회계사들은 5공 정권이 회계감사 자유수임제를 도입한 이후 ‘기업 봐주기’ 경쟁이 시작됐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금감원은 “경제 전반적인 자유화 추세를 거스를 수는 없다”며 현 체제를 고수하고 있다.
다행스러운 점은 회계법인들의 실력행사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 12월 결산한 은행들이 대우채 손실을 2년에 걸쳐 나눠 처리할 것을 요구했으나 회계법인들의 공동 압력에 눌려 포기한 것이 좋은 사례다. 김원장은 “전문 영역인 회계감사의 투명성은 결국 감사인 스스로 가꿔야 한다”며 “회계법인들이 특정사안에 대해 공동대처하는 것은 피감사법인을 견제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평가했다.
<박래정기자> eco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