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왕자의 난'2R]"아버지는 내편"추악한 전쟁…그룹 두동강

  • 입력 2000년 3월 26일 19시 57분


현대그룹이 사실상 두 동강이 났다.

정몽구(鄭夢九) 정몽헌(鄭夢憲) 두 형제의 그룹 후계구도를 둘러싼 암투는 갈등의 수준을 넘어 어느 한 쪽이 치명상을 입고 ‘항복’ 의사를 밝히기 전에는 끝날 수 없는 단계로 치닫고 있다.

양쪽 모두 정주영(鄭周永)명예회장의 친필사인을 받았다며 “내가 후계자”라고 주장하고 나서 현대 내부 관계자들조차 “도대체 누구 말이 맞느냐”고 물을 정도로 현대그룹은 극도의 혼미상태에 빠졌다.

▽명예회장의 뜻은〓두 형제간의 갈등이 끝없이 증폭되고 있는 데는 양쪽 입장을 모두 인정하는 듯한 정명예회장의 분명치 않은 태도가 일조했다. 두 형제는 △현대증권 이익치(李益治)회장 경질 △정몽구회장 그룹회장직 박탈 △몽구회장 다시 복귀 △이를 부정하는 명예회장의 지시 등 그룹 최고경영자의 인사를 모두 “아버지의 사인을 받았다”며 네 차례나 번복하는 코미디 같은 상황을 연출했다.

그룹의 최고 의사 결정권자가 정명예회장이고 아직도 명예회장의 영향력이 막강하기 때문에 두 형제 모두 “아버지는 내 편”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아버지의 뜻이 자주 바뀌다보니 누구의 말도 신뢰할 수 없는 상황이 온 것. ‘정명예회장의 말이 곧 법’인 현대그룹에서 ‘법’이 흔들리다 보니 혼돈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도대체 정명예회장의 건강이 정상적인 상태냐’하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나오고 있다.

▽명예회장의 건강은〓두 형제가 앞뒤를 가리지 않고 싸우는 데는 “아버지의 건강상태가 극히 좋지 않다”는 판단이 배경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현대그룹측은 정명예회장의 건강에 대해 “허리가 좋지 않아 부축을 받아야 하지만 판단이 흐려질 만큼 정신상태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재계는 현대측의 설명을 믿지 않는다. 정명예회장의 성격상 자신이 내린 결정을 불과 며칠 만에 뒤집은 적이 없는데다 최근의 행태로 볼 때 정상상태로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

재계에서는 두 형제가 정신이 혼미한 아버지에게 찾아가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사인을 받아와 대외적으로 발표하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조급한 후계 싸움의 배경에도 정명예회장의 건강상태가 더 악화되기 전에 일을 끝내자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분석한다.

▽두 아들의 이전투구〓몽구회장측이 TV로 중계까지 된 24일의 구조조정본부 발표를 뒤집은 것은 ‘이번에 밀리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는다’는 위기의식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예정대로 몽헌회장이 그룹회장 자격으로 27일 기자회견을 갖고 향후 그룹 경영방침을 밝히면 현재의 상황이 기정사실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 것.

명예회장의 주변을 몽헌회장측이 장악하고 있는 것도 몽구회장을 초조하게 하고 있다. 몽헌회장은 언제라도 왕회장을 독대할 수 있지만 몽구회장이 왕회장을 만날 때는 MH인사인 김윤규현대건설사장이 배석하는 등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몽구회장측 인사들은 “몽구회장을 벼랑으로 몰고 가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은 몽헌회장”이라며 “이익치회장 경질인사를 원위치시키면 됐지 몽구회장에게서 그룹회장직을 박탈한 것은 너무한 것이 아니냐”고 말하고 있다.

몽헌회장이 27일 기자회견 후 이번 사태를 야기한 현대자동차 등 MK측 인사들에 대해 대대적인 문책인사를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몽구회장의 측근들이 위기의식을 느껴 필살의 승부수를 던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현대의 앞날〓지금이라도 정명예회장이 직접 나서 후계구도를 정리하면 갈등은 수습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아들들이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거나 명예회장의 건강이 사태를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경우라면 내분은 상당기간 지속될 수밖에 없다. 27일 몽헌회장의 기자회견에도 명예회장이 나오기는 어려운 것으로 확인돼 내분은 장기화할 가능성이 높다.

정명예회장이 사태를 정리하지 못하면 두 형제는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계열사의 지분을 무기로 법정에서 싸울 수밖에 없다. 이미 정상적인 형제 관계를 벗어났기 때문에 가능한 시나리오다.

정명예회장이 끝까지 중재에 나설 수 없다면 유언장이 공개되는 순간까지 두 형제의 갈등은 끝이 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반대로 정명예회장이 상황을 종료시키면서 이번 사태를 야기한 책임을 묻는다면 두 형제중 한 명이 추락하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정명예회장이 직접 나선다면 자신의 지분으로 캐스팅 보트를 행사하는 형태가 될 전망이다.

<이병기기자> ey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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