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가족경영의 폐해가 드러났다’는 재정경제부의 공개 비난을 신호탄으로 재벌개혁의 칼을 뽑아들었지만 ‘어떻게 베어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이다. 재벌들 역시 지주회사 설립요건이 채 익지 않은 상태에서 구조조정본부의 존폐가 화두로 거론되자 몹시 당혹스러운 처지.
▽고민하는 정부〓정부가 사용할 수 있는 재벌개혁 카드는 크게 기업지배구조의 강화와 금융규제 등 두 가지. 정부는 지난해 증권거래법을 개정, ‘총자산 2조원 이상 상장법인의 경우 2001년부터 등재이사 절반 이상을 사외이사로 둬야 하고 감사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제조항을 포함시켰다. 이와 함께 98년부터 그룹별로 주채권은행과 ‘부채비율 200% 달성’을 골자로 하는 재무구조개선약정을 체결, 신규투자 제한과 부실계열사 분리를 유도해왔다.
그러나 재경부는 28일 “그동안 내놓은 개혁정책 이행여부를 점검하겠다”고만 밝혔을 뿐 진전된 카드를 내놓지는 못했다. 이헌재장관이 27일 ‘여신제재 검토’를 운운했던 서슬퍼런 기세에 비하면 공세수위가 낮아진 느낌. 기업지배구조 개선작업의 초창기에 현대의 경영권 분쟁이 벌어져 관련 규정을 급작스럽게 손보기도 어려운 처지다. 금융제재를 담당할 금감위나 금감원측은 아예 ‘여신제재 검토’ 발언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룹들이 채권단과 맺은 재무구조개선약정에 ‘구조조정본부 존치여부를 놓고’ 제재를 가할 수 있는 근거규정이 없기 때문.
금감원측은 오히려 28일 “현대 등 재벌 금융사에 대한 특별검사를 앞당길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금융제재’ 발언이 현대 내분과 별도로 금융시장에 가져올 파장을 우려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당황하는 재계〓재계는 이같은 정부의 한계를 잘 알면서도 긴장하고 있다. 법 제도를 떠나 정부와의 관계가 악화될 경우 당할 수 있는 불이익이 곳곳에 널려 있기 때문.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는 “금융업 진출 신규 인허가나 유상증자 신고 등 금융당국이 제재를 가할 수 있는 ‘절차’들이 많고 극단적인 경우 세무조사도 감수해야 한다”며 전전긍긍해하고 있다.
현재 정 재계의 갈등은 구조조정본부와 경영자협의회 같은 계열사의 독립경영에 간섭하는 기구들의 폐지 여부로 모아진다. 그러나 재벌들은 “그룹 계열사간 협조를 조율하고 대정부 창구를 맡을 기구는 여전히 필요하다”며 다른 재벌들의 동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현대측은 “지금 당장 해체하는 것은 구조조정에 도움이 안된다”는 입장이고 삼성과 SK 역시 ‘지주회사 설립요건이 완화되지 않았다’며 현실론을 주장한다.
그러나 재계 일각에서는 정부의 개혁공세가 더욱 강해지기 전에 주력계열사에 구조조정본부를 옮기는 ‘상징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절충론도 대두되고 있어 다음주 발표될 현대의 ‘중대발표’가 2단계 개혁의 단초가 될 가능성도 적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박래정·임규진기자>eco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