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가 이날 정회장이 밝힌 내용대로 실천만 한다면 사실상 수십년을 유지해온 총수의 계열회사에 대한 지배력은 최소한에 그치게 된다.
재벌총수는 그동안 핵심계열사의 주식지분을 이용, 핵심회사 몇 개가 상호지분출자를 통해 수많은 계열기업을 만든뒤 총수 한 명이 전 계열사를 장악하고 전횡을 휘둘러왔다. 각 계열사 최고 경영자는 다른 주주는 안중에도 없고 오직 총수만을 쳐다보는 ‘해바라기 경영’을 해왔다.
▽황제경영 끝났나〓기자회견 내용중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총수의 권위를 뒷받침해온 경영자협의회와 총수의 ‘눈과 발’ 역할을 해온 구조조정본부의 해체약속.
이 두 기구의 실체는 정주영(鄭周永)명예회장이 경영자협의회에서 정몽헌 회장을 후계자임을 선언하고 김재수(金在洙) 구조조정본부장이 “그룹의 모든 인사는 구조조정본부에서 발표하지 않는한 정통성이 없다”고 수차례 강조한데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따라서 이 두 기구가 ‘명실상부하게’ 해체되고 각 계열사의 사외이사와 인사위원회가 제 몫을 한다면 총수가 전횡을 하고 싶어도 하기 어려운 환경이 조성된다.
그러나 총수가 핵심 계열사의 주식을 틀어쥐고 각 계열사가 상호지분출자로 얽혀있는 한국적 현실에서 총수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계열사에 대해 일일이 간섭한다면 이를 막을 방법이 별로 없다. ‘재벌의 소유구조가 변화하지 않는 한 황제경영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대 회장직 유지 논란〓 가장 논란이 된 대목은 ‘현대 회장’직 유지 부분. “새로운 산업진출 등 현대의 앞날이 달려있는 중요한 판단은 역시 대주주인 회장이 결정을 내려야하기 때문에 회장직은 필요하다”는 것이 현대측의 배경설명. 예를 들어 현대가 수조원을 들여 바이오산업에 진출해야하는데 그룹의 구심점이 없이 각 계열사가 독립경영만을 추구, 출자를 반대하면 장기적으로는 현대의 경쟁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에 대해 시민단체측은 “사장단 모임과 종합기획실이 이름만 바꾸어 경영자협의회나 구조조정본부가 그 역할을 이어 받은데서 알 수 있듯 회장직을 아예 없애지 않는 한 총수의 황제경영은 끝나지 않는다”며 “회장직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거 경험으로 볼 때 양측 주장은 모두 일리가 있는 주장. 결국 이 논란은 정회장이 자신의 약속을 행동으로 증명하고 회장직의 순기능이 두드러질 때만 중지될 것으로 보인다.
<이병기기자>ey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