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 방향]'황제경영' 종식 틀은 마련

  • 입력 2000년 3월 31일 20시 52분


정몽헌(鄭夢憲)회장과 현대 관계자들은 31일 기자회견에서 누차에 걸쳐 “법(상법)대로 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재벌총수가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황제경영’을 해왔음을 결국 인정한 셈이다.

현대가 이날 정회장이 밝힌 내용대로 실천만 한다면 사실상 수십년을 유지해온 총수의 계열회사에 대한 지배력은 최소한에 그치게 된다.

재벌총수는 그동안 핵심계열사의 주식지분을 이용, 핵심회사 몇 개가 상호지분출자를 통해 수많은 계열기업을 만든뒤 총수 한 명이 전 계열사를 장악하고 전횡을 휘둘러왔다. 각 계열사 최고 경영자는 다른 주주는 안중에도 없고 오직 총수만을 쳐다보는 ‘해바라기 경영’을 해왔다.

▽황제경영 끝났나〓기자회견 내용중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총수의 권위를 뒷받침해온 경영자협의회와 총수의 ‘눈과 발’ 역할을 해온 구조조정본부의 해체약속.

이 두 기구의 실체는 정주영(鄭周永)명예회장이 경영자협의회에서 정몽헌 회장을 후계자임을 선언하고 김재수(金在洙) 구조조정본부장이 “그룹의 모든 인사는 구조조정본부에서 발표하지 않는한 정통성이 없다”고 수차례 강조한데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따라서 이 두 기구가 ‘명실상부하게’ 해체되고 각 계열사의 사외이사와 인사위원회가 제 몫을 한다면 총수가 전횡을 하고 싶어도 하기 어려운 환경이 조성된다.

그러나 총수가 핵심 계열사의 주식을 틀어쥐고 각 계열사가 상호지분출자로 얽혀있는 한국적 현실에서 총수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계열사에 대해 일일이 간섭한다면 이를 막을 방법이 별로 없다. ‘재벌의 소유구조가 변화하지 않는 한 황제경영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대 회장직 유지 논란〓 가장 논란이 된 대목은 ‘현대 회장’직 유지 부분. “새로운 산업진출 등 현대의 앞날이 달려있는 중요한 판단은 역시 대주주인 회장이 결정을 내려야하기 때문에 회장직은 필요하다”는 것이 현대측의 배경설명. 예를 들어 현대가 수조원을 들여 바이오산업에 진출해야하는데 그룹의 구심점이 없이 각 계열사가 독립경영만을 추구, 출자를 반대하면 장기적으로는 현대의 경쟁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에 대해 시민단체측은 “사장단 모임과 종합기획실이 이름만 바꾸어 경영자협의회나 구조조정본부가 그 역할을 이어 받은데서 알 수 있듯 회장직을 아예 없애지 않는 한 총수의 황제경영은 끝나지 않는다”며 “회장직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거 경험으로 볼 때 양측 주장은 모두 일리가 있는 주장. 결국 이 논란은 정회장이 자신의 약속을 행동으로 증명하고 회장직의 순기능이 두드러질 때만 중지될 것으로 보인다.

<이병기기자>ey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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