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헌재장관 발언 속뜻은] 정부 개입 부담, 복선 깐듯

  • 입력 2000년 4월 9일 20시 21분


2단계 금융구조조정에 대한 정부의 진짜 속뜻은 무엇일까.

요즘 금융계의 촉각은 정부가 과연 금융권 재편을 위한 밑그림을 갖고 있는지에 쏠려 있다. 최근 재정경제부와 금융감독위원회의 의견이 다른 것처럼 비쳐지면서 궁금증은 더욱 증폭되는 양상.

이용근(李容根)금감위원장은 기회 있을 때마다 합병을 통한 은행 대형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반면 이헌재(李憲宰)재경부장관(사진)은 지난달 27일 “총선 이후 정부가 나서 은행간 짝짓기를 유도하는 등 2단계 금융개혁을 서두르는 일은 없을 것이며 따라서 올해 안에 눈에 띄는 은행합병은 이뤄지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장관은 며칠 뒤 “무엇이 최선의 선택인지 은행 경영진이 잘 판단해야 하겠지만 이 상태로 놔두면 연말까지 성과가 나오기 힘들 것이라는 의미”라고 부연 설명했다. 요컨대 구조조정은 절실하지만 시장이 스스로 그 길을 택하지 않는 이상 정부가 강요할 수는 없다는 것.

금융계 일각에서는 이장관의 발언을 ‘총선용 립서비스’ 정도로 폄훼하는 분위기도 없지 않다. 하지만 민감한 사안을 언급할 때 복선을 깔아두기로 유명한 이장관 특유의 발언법을 감안할 때 ‘실없는 소리’로 치부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이장관이 한발 빼는 듯한 태도를 취한 진짜 이유는 정부 주도 합병에 필수적인 공적자금 확보가 쉽지 않다는 현실을 인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가뜩이나 국가부채 문제가 선거이슈로 떠오른 마당에 구조조정 추진의지를 재천명하다 보면 재원 마련이 관심사로 떠올라 결국 국민부담을 뜻하는 공적자금 조성 논란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염두에 뒀다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금감위는 금융구조조정의 조속한 완료라는 ‘원론’에 충실한 반면 재경부는 시장상황에 따른 유연한 대처를 강조하는 입장. 재경부 관계자는 “이장관의 발언에는 2년 전과 같은 밀어붙이기식 통폐합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정부의 고민이 깔려 있다고 해석해야 한다”면서 “정부가 금융구조조정에서 손을 뗀 것으로 보는 시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고도로 계산된 발언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박원재기자>parkwj@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