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박명광/금융부실 책임부터 가려라

  • 입력 2000년 5월 22일 19시 13분


최근 언론에 다시 ‘도덕적 해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이 말은 최근의 정보경제학에서 처음 쓰기 시작한 말로 정보를 가진 자가 정보를 갖지 못한 자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을 하여 결국은 후자와 사회 전체에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히는 사회적 병리현상을 뜻한다.

종합보험에 가입한 사람 중에는 난폭 운전자도 있다. 그는 사고를 내더라도 보험회사가 모든 사고비용을 물어준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난폭운전을 상습적으로 할 수 있다. 이같은 도덕적 해이 현상은 보험회사나 다른 보험가입자에게 막대한 손실을 끼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예컨대 기초공제제도가 도입돼 손실액의 상당부분을 본인이 부담하게 하면 도덕적 해이현상은 어느 정도 줄일 수 있다.

그런데 이른바 도덕적 해이가 만연해도 그에 대한 대책이 없는 분야가 수두룩하다는 것이 우리나라 경제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취약점이다. 중앙, 지방정부를 비롯해 공공부문이나 재벌을 필두로 한 기업부문에서 도덕적 해이가 만연해 국제통화기금(IMF) 위기라는 전대미문의 역경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우리 사회의 역기능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최근에는 오히려 더 기승을 부리고 있어 우려를 낳고 있다.

정부와 기업은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 경제의 핵을 쥐고 있는 금융분야에서의 도덕적 해이현상은 그것이 경제의 젖줄이요 생명줄이라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더하다.

금융분야에서의 도덕적 해이는 우리나라 금융계의 오랜 병폐인 부실대출과 부실투자에 대한 정보가 즉각 공개되지 않으며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풍토에서 확인되고 있다.

몇백만, 몇천만원의 서민가계나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에 문제가 발생하면 말단직원에게 혹독한 책임이 추궁되지만 몇백억, 몇천억원이나 되는 대기업 부실 대출금에 대해서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풍토가 일반화된 것이다.

IMF사태 직전 러시아의 정크 본드 투자 때문에 몇천억원의 손실을 보았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금융계에서 누가 책임졌다는 소식은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이런 관행은 지금이라고 해서 나아진 것이 없다.

물론 사외이사제가 도입되고 일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액주주보호운동이 우리 모두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금융기관에 대한 정보접근성은 아직도 요원한 실정이다. 금융기관장의 인사권이 아직도 정부에 있고 일반주주의 경영권 참여가 제한돼 있는 한 금융계의 도덕적 해이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실정에서 정부는 제2금융권 구조조정에 나설 태세이고 여기에 국민의 혈세 30조원이 투입될 모양이다. 그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의 몫으로 넘어오게 돼 있다. 가구당 20여만원씩을 모금해서 제2차 금융구조조정작업을 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금융계에 만연돼 있는 도덕적 해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 처방이 없이 진행되는 어떤 구조조정도 성공할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결국 우리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의 순환고리에서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

금융기관의 부실경영에서 발생한 손실을 고스란히 정부와 국민이 물어주는 관행이 이 지구상 어느 나라에 존재한단 말인가. 따라서 국민 모두는 이번 조치의 결과에 관심을 갖고 진정한 주인으로서의 감시를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정보에 눈이 어둡고 사실을 알아도 행동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언제나 국민이 봉이 되는 시대는 끝나야 한다.

더 이상 우리 사회에 도덕적 해이가 만연되고 그것이 금융 경제위기로 이어지는 불행한 사태가 되풀이돼서는 안된다. 국민 모두에게 자기 몫을 분명히 챙길 줄 아는 선진시민의식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박명광(경희대 대외협력부총장·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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