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진 압력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

  • 입력 2000년 5월 29일 19시 36분


현대증권 이익치(李益治)회장의 거취가 다시 도마에 올랐다.

정부와 주채권은행측이 현대사태 해결의 선결조건 중 하나로 이회장과 현대투신증권 이창식(李昌植)사장의 퇴진을 거론하고 나서 이들의 진퇴문제가 초미의 관심사가 된 것.

정부 고위당국자와 주채권은행측은 실명을 거론하진 않았지만 “이번 사태를 촉발한 투신문제에 책임있는 인사에 대해 상응한 조치가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혀 두 전문 경영인을 간접적으로 지목했다.

그러나 현대는 강경한 입장. 28일 밤 발표된 자구계획에 인사문제는 한줄도 언급하지 않았다. 정몽헌(鄭夢憲·MH)현대회장은 왜 끝까지 이회장을 두둔하고 있을까.

이회장은 오래전부터 부동의 MH인맥으로 올 3월 현대 후계구도를 둘러싼 몽구(夢九·MK)회장과의 이른바 ‘왕자의 난(亂)’때 막후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고려산업개발회장으로 자신을 내친 MK측에 반발, 꿋꿋하게 버틴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또 92년 현대상선 비자금 사건으로 1년 넘게 수감됐던 MH로서는 현대전자 주가조작에 연루돼 역시 옥살이를 한 이회장을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입장에서 끝까지 챙기고 싶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현실적으로는 금융과 전자를 그룹의 중심축으로 키우려는 MH가 금융쪽 대리인으로 이회장 기여도 및 그 말고는 적역이 없다는 이유도 작용하고 있다는 풀이.

69년 현대건설에 입사한 이래 엔진 중공업 등 주로 실물부문을 맡았던 이익치회장이 일약 ‘여의도의 스타’로 부상한 것은 98년 3월. ‘한국경제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강한 메시지와 함께 내놓은 바이코리아 펀드가 대성공을 거두면서부터.

가는 곳마다 “3년 안에 100조원을 모으겠다” “주가지수는 3년 내 3000, 6년 내 6000까지도 가능하다”고 역설했다.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주술가’라는 비아냥거림도 많았지만 바이코리아 펀드가 발매 6개월만에 12조원에 육박하는 수탁고를 올리자 평가가 달라졌다.

수감시절 증권사 사장단이 구명(求命)운동을 벌였고, 작년 11월 집행유예로 석방되자 현대증권 주가가 급등하기도 한 것은 각계 마당발인 그가 증권가의 거물(巨物)로 확실히 자리잡았음을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

96년 부임할 당시 약정순위 7위에 불과했던 현대증권을 업계 선두로 끌어올린 것은 타고난 집념이라는 게 주변 사람들의 전언. 그의 ‘오기’를 엿볼 수 있는 일화로 골프를 배울 때 왼손 힘을 기르기 위해 왼손으로만 식사를 했고, 수천번의 스윙으로 손바닥에 피가 엉겨붙자 뜨거운 물로 녹여 클럽을 떼어내기도 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덕분에 이회장은 입문 1년 만에 프로 뺨치는 골프실력을 갖췄다.

정주영(鄭周永)현대 명예회장이 한창 사업을 키우던 시절 초대 그룹회장 비서실장을 지낸 현대 비서실 1세대 출신. 동물적 안목과 저돌적인 추진력은 정명예회장을 그대로 빼닮았다. 존경하는 인물은 ‘당연히’ 정명예회장이다.

<정경준기자>news9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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