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자구책 발표]王회장-두아들 '폭탄선언'

  • 입력 2000년 5월 31일 18시 55분


31일 오후2시20분 경영 개선 계획을 발표하기 위해 서울 계동 현대 본사 15층 회의실로 들어서는 김재수(金在洙)구조조정본부장은 흥분한 표정이었다. 그는 자리에 앉아서도 잠시 멍한 표정으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오후 2시로 예정됐던 발표는 이미 20여분 이상 지난 후였다. 그는 “현대의 경영 계획을 발표하기 전에 오늘 오전 정주영명예회장이 결심하신 사항을 먼저 낭독해드리고 발표문을 읽겠다”고 말을 꺼냈다. 장내는 잠시 술렁거렸다. 이어 정명예회장은 물론 정몽구현대자동차회장, 정몽헌현대회장도 모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겠다는 ‘폭탄선언’을 발표했다.

장내의 술렁거림은 놀람으로 바뀌었다. 취재진은 물론 현대 구조조정본부의 핵심 인사들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김본부장은 “현대에 수십년간 몸담아 온 나 자신에게도 충격적인 일”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정명예회장을 비롯한 두 아들 회장의 퇴진이 발표될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심지어 당사자인 두 아들도 이 같은 사실을 미처 전해 듣지 못했다.

김본부장은 이날 오전 정명예회장의 호출을 받고 청운동 자택으로 들어갔다고 말했다. 이어 정명예회장의 결심을 구두로 듣고 이를 정리해 명예회장의 친필 사인을 받아 발표장에 들고 나온 것.

퇴진을 ‘통보’받은 정몽구회장은 “구조조정본부가 일방적으로 발표한 것”이라며 반발했고 정명예회장은 본사 15층 집무실로 출근해 ‘달래기’에 나섰다. 약 한 시간 뒤 정명예회장과 함께 1층에 모습을 드러낸 두 회장은 취재진에게 “아버지의 뜻에 수긍한다”는 제스처를 보였다.

3부자가 인사동의 한 한식집에서 가진 저녁 식사 자리에는 김윤규현대건설사장과 이익치현대증권회장 등 ‘가신’ 그룹이 합류했다.

이 자리에서 정몽구회장은 자신도 ‘전문 경영인’임을 강력히 주장했다고 한다. 30년간 자동차 부문만 맡았으며 외국 기업과 전략적 제휴를 추진하는 상황인데 경영에서 손을 뗄 수 없는 시기라고 아버지를 설득했다. 정명예회장은 이에 대해 “원리 원칙대로 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명예회장의 뜻대로 끝날 것 같던 이날 상황은 정몽구회장이 자동차 수뇌부 회의를 거쳐 다시금 수긍할 수 없다는 내용의 발표문을 돌리면서 원점으로 돌아갔다. 최한영 현대자동차 상무는 “구조조정본부의 발표는 법적 근거가 없어 무효”라고 선언했다.

<구자룡·홍석민기자>sm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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