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鄭周永)명예회장이 ‘현대그룹 해체’ 결단을 내리면서 몽구(夢九), 몽헌(夢憲) 두 아들과 함께 경영 일선에서 퇴진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자동차 소그룹을 맡고 있는 정몽구회장이 명예회장의 거듭된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자동차 전문 경영인으로 남겠다”고 밝혀 부친의 동반 은퇴 방침을 정면으로 거부했다. 이에 따라 3부자 은퇴를 전제로 한 현대의 자구 계획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사태 진전 여부에 따라서는 정씨 가문과 현대 그룹에 돌이키기 어려운 내분을 야기할 것으로 우려된다.
▽계열사의 앞날은〓계열사의 변화 중 가장 확실한 것은 자동차 소그룹의 변화. 명예회장이 “필요하면 국제적인 경영 감각을 가진 전문 경영인을 영입한다”고 말한 점을 감안할 때 현재 가장 유력한 안은 자동차 소그룹은 그룹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외국에서 전문 경영인을 영입해 정몽구회장의 자리, 즉 자동차그룹회장 자리를 맡기는 시나리오다.
자동차그룹 회장은 현대 및 기아자동차 현대정공 현대캐피탈 등 4개사를 이끈다.
그러나 정몽구회장이 자동차회장 유지를 고수하고 나섬에 따라 상황은 예측할 수 없게 됐다. 정몽구회장이 은퇴를 거부하고 계속 자동차를 맡겠다고 나설 경우 이를 막을 수단이 없다. 이 경우 3부자의 동반 은퇴라는 근본 틀이 흔들리게 된다.
만약 정몽구회장이 자진 사퇴한다면 이계안(李啓安)현대자동차사장이 자동차그룹 회장으로 승진할 가능성도 있다.
정몽헌 회장은 “남북경협사업에만 전념한다”는 명예회장의 교통정리가 있었으므로 그룹회장은 물론 전자 및 건설 회장직에서 물러나고 남북경협을 전담하는 현대아산을 맡을 것으로 보인다. 김윤규(金潤圭)현대건설 및 현대아산 사장이 현재 자리를 유지하면서 몽헌회장의 대북 사업을 보좌할 것인지 아니면 아산 사장자리를 내놓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현대중공업과 미포조선은 2003년 그룹에서 분리되며 정몽준(鄭夢準)현대중공업 고문은 대주주로 남고 전문경영인 체제로 간다는 원칙이 서있는 상태. 중공업소그룹으로의 분리는 이번 발표로 당초 계획보다 앞당겨질 것으로 보인다.
현대증권 현대생명 현대투신증권 등 금융계열사들은 독자 생존보다는 자동차소그룹처럼 금융전문그룹으로 분리될 가능성이 높다. 이때 소그룹의 회장은 누가 맡을 것인지, 이익치(李益治)현대증권 회장이 현직을 유지할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현대그룹 고위 관계자는 “금융부문은 외국인 경영자 영입이 거론된 적이 있으므로 외국인 회장이 영입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세 부자가 퇴진하면서 대표적인 전문경영인마저 물러나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시각이 현재로선 우세하다.
전자 건설 상선 종합상사 등 각 계열사는 그룹체제보다는 독자 생존의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정씨 일가의 영향력은〓명예회장은 31일 “나는 뒤에 앉아서 (주주로서) 감독 관리만 하겠다”고 말했다.
따라서 정명예회장 등 세 부자는 대주주로서 일선 경영에는 간섭하지 않지만 경영자가 회사 운영을 잘못하거나 경영 환경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경우 이사회나 주주총회를 소집해 경영자를 해고하고 다른 사람을 최고 경영자로 영입하거나 임명할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정씨 일가가 각 계열사의 주주이사 자격으로 이사회에 참석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오지만 31일 발표의 의미를 생각해볼 때 이사직도 내놓을 것이라는 게 대다수의 견해다.
이에 따라 명예회장과 몽구회장은 현대자동차의 최대 개인주주 자격으로 자동차그룹을 통제하고 몽헌회장은 건설 상선 전자 등을 통제할 것으로 보인다. 다른 재벌그룹들과 마찬가지로 각 계열사가 상호출자로 얽혀 있기 때문에 자동차 건설 전자 중공업을 통제하면 모든 계열사를 장악하게 된다.
▽계열 기업간의 협조〓계열사가 독자경영 체제로 갈 경우 부실한 계열사를 살리기 위해 우량 계열사들이 함께 부실화되는 재벌의 폐해는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계열사들이 과거에 누렸던 시너지효과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자동차와 상선, 상선과 미포조선, 전자 자동차 등 수출기업과 종합상사의 협조 관계가 깨질 경우 일부 회사들은 독자 생존에 애로를 겪을 가능성이 높다.
현대 관계자들도 아직 해답을 갖고 있지 않은 계열사간 출자 정리도 고민거리.
예를 들어 현재 우량회사인 현대중공업이 그룹의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각 계열사 지분을 매각하면 양사 간에 심각한 갈등이 일어날 수 있다. 특히 현대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외부 영입 경영인이 회사 이익과 주주 이익만을 위해 경영한다면 과거에 계열사끼리 얽힌 관계 때문에 동지가 적으로 변할 수도 있다.
이번 발표는 현대가 첫걸음을 뗀 전인미답의 길이기 때문에 당분간은 새로운 상황이 닥칠 때마다 그때그때 최선의 선택을 찾아내는 수밖에 없을 전망이다.
<이병기·이훈기자>ey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