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입김을 강하게 받는 금융연구원이 18일 경제가 심상치 않다며 경고성 보고서를 내놓았다. 연구원은 “체질개선 없이 잠재성장률을 넘어선 높은 성장을 한 탓에 유가 및 국제금리 상승 등 외부적 충격이 가해질 경우 고성장 뒤의 침체가 예상된다”고 우려했다. 근본대책을 서둘러야 한다는 주문이다.
남북 정상회담으로 한반도가 후끈 달아오른 지난주 경제구조의 허약성은 더욱 분명해졌다. 주식시장과 기업자금 운용의 ‘윤활유’인 회사채 기업어음(CP)시장은 조그마한 루머에도 출렁거리며 위기론을 확산시키고 있다.
▽위기의 징후들〓자금시장의 수급균형은 이미 깨졌다. 현대의 유동성위기, 투신권과 은행의 잠재부실 공개 예고, 대우채 손실분담을 둘러싼 투신권과 정부의 갈등 등이 7월 시가평가제 실시를 앞두고 숨돌릴 틈 없이 터지면서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금융권은 외환위기 직후를 연상시키는 혼돈상이다. 중견 재벌 3, 4곳의 부도가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진단마저 나오는 상황이다. 이달과 다음달에 각각 3조5000억원, 5조6000억원어치의 회사채 만기가 오지만 금융기관 어느 곳도 이를 소화할 여력이 없다.
하반기 경제운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진다. 씨티은행 서울사무소는 이날 “연말엔 인플레이션 압력이 가중되면서 긴축정책을 써야 하지만 자금시장 불안 때문에 금리를 올릴 수 없어 문제”라고 지적했다. 저금리기조를 더 이상 떠받치기 어려운 순간이 왔다는 경고다.
지난달 배럴당 25.80달러(두바이산 기준)였던 국제유가는 이달 16일까지 27.19달러로 가파르게 올랐다. 경상수지 흑자폭이 줄어든다는 얘기다. 100개의 수출품으로 사들일 수 있는 수입물량을 따지는 교역조건도 지난달 76.7을 기록해 95년 이후 최악이다.
▽어정쩡한 정부〓관료들은 ‘펀더멘털의 문제’라기보다는 금융부문에 국한된 단기적인 불확실성이 위기를 키운 것으로 간주한다. 이기호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은 경제성장률 어음부도율 실업률 등 펀더멘털은 양호하며 기업 금융 구조개혁의 불확실성을 원인으로 지적했다. 정부는 이에 따라 지난 주말 ‘마찰적 수급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돈이 몰리는 은행자금을 회사채나 CP시장으로 돌려세우는 시장안정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 대책은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A기업 자금담당 김모 전무는 “우리는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데 정부는 다음 달에나 작동될 대책을 내놓았다”고 하소연이다.
금감위나 금감원 고위관계자들은 지금 ‘시장불개입’ 원칙 고수와 자금시장의 대혼돈 사이에서 여론과 정치권 분위기를 탐색하고 있다. 시장대책 후속조치에 매달려야 할 18일 금융정책 관계자들 상당수는 국회 상임위 보고에 매달려야 했다.
▽어떤 대책이 나와야 하나〓우선 기업 돈이 돌아가도록 채권을 사들이는 자금을 마련하는 게 급선무. 정부가 발표한 10조원대의 회사채펀드 조성방안은 이점에서 일리가 있다. 그러나 여유 돈이 넘쳐나는 은행권이 6월말 결산을 앞두고 고위험채권을 살 리 만무해 재원마련은 힘들어 보인다. 반면 시장에선 당장 기업들이 쓰러진다고 아우성이다.
따라서 정부가 자금난을 겪는 금융기관에 담보를 잡고 긴급자금을 방출하거나 회사채 만기를 일괄 연장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일단 경쟁력 있는 기업까지 도산하는 것을 막아 금융권 부실이 추가되는 악순환을 막자는 취지다.
장기적으론 정부가 구조조정의 대원칙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정치적 외풍을 차단해가며 금융기관의 구조조정 실적을 투명하게 점검하고 대마불사의 관행을 스스로 단절해야 한다. 공적자금 조성, 금융지주회사 등 구조조정 방향이 왜 많은 경제전문가들의 냉소를 받는지 정부는 숙고할 때다.
<박래정·박현진·이나연기자>eco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