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공업은 28일 현대전자와 현대증권, 박종섭(朴宗燮)현대전자 사장과 이익치(李益治)현대증권 회장을 상대로 “현대중공업이 지급보증에 따라 손실을 입은 2억2048만달러(약 2400억원)와 이자 등을 배상하라”며 외화 대납금 반환 및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서울지법에 냈다.
현대중공업은 소장접수에 맞춰 이사회 명의로 성명을 발표했다. “이번 사건은 경영을 투명하게 만들고 주주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고육책일 뿐 일부 언론이 제기하는 경영권 다툼과는 전연 무관하다”고 밝혔다. 지급보증해준 돈을 받아내지 못하면 중공업에 투자한 주주들만 손해를 보게 되는데 이를 시정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처였다는 것이다. 한 사외이사는 “제소 결정은 이사들의 자발적인 뜻에 의해 이루어졌다”면서 “이를 형제간 다툼으로 몰고가는 것은 이사들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며 흥분하기도 했다.
현대중공업의 이같은 움직임에 대응해 현대전자와 현대증권측도 각각 변호인 선임작업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사상 초유의 현대 계열사간 법정 대결이 불가피해졌다.
▽정몽헌(鄭夢憲·MH)회장의 움직임이 변수〓분쟁이 조속하게 해결되려면 당사자인 현대전자와 현대증권이나 중재자로 나선 현대 구조조정본부가 현대중공업이 소를 취하할 만한 명분을 제공해야 한다. 현대 구조조정본부 관계자는 “일단 소송은 제기됐지만 양측과의 접촉을 통해 타협점을 찾아내려고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룹내 세력구도나 상황 전개상 구조조정본부의 중재나 타협안을 현대중공업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아직 미지수여서 지루한 법정 공방이 벌어질 가능성도 있다.
결국 다음달 초 귀국 예정인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이 ‘해결사’로 나설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당초 알려졌던 것처럼 MH가 시가 1500억원 상당의 현대전자 주식 835만주를 내놓을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 구조조정본부 관계자는 “MH가 사재를 출연한다는 얘기인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일축했다. 현대중공업 사외이사인 박진원(朴進遠)변호사도 “법인과 법인간의 문제에서 주주가 무슨 개입을 하느냐”며 이번 사안은 MH가 개입할 사안이 아니라고 못박았다.
현대중공업측에서는 현대전자가 현대상선이 보유한 현대중공업의 지분을 사서 이를 현대중공업에 되파는 것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 주목된다.
▽이익치회장의 운명〓소송의 상대방(피고)으로 ‘손실보전 각서’의 주인공인 이회장이 포함된 데 대해 이번 소송이 처음부터 이회장을 겨냥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현대중공업측에선 분쟁의 대상이었던 현대전자보다 오히려 이회장과 현대증권에 대해 격앙된 모습이다. 현대전자가 캐나다 왕립상업은행(CIBC)으로부터 1억7500만달러를 끌어오는 과정에서 위법성 여부를 조사하겠다는 금융감독원의 발표도 최종적으로는 이회장을 겨냥한 것이 아닌가 하는 관측도 나온다.
그러나 이회장은 이날 평소와 다름없이 회사에 나타나 임원회의를 주재하면서 “당시의 관행과 그룹차원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으며 개인적으로 잘못한 것이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강조하는 등 동요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일부 직원들은 이회장에게 힘을 내라고 격려하기도했다. 현대전자측의 반응도 비교적 담담했다.
▽자동차와 중공업의 단결〓이번 분쟁의 직접 당사자가 아닌 현대자동차 관계자들은 은근히 현대중공업측을 옹호하고 있다. 특히 이회장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는 맞장구를 치고 있다. 현대차측의 이같은 반응은 그동안 이회장이 MH편에 서서 자동차측를 공격하는 입장을 취해온 데 따른 반감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재계일각에서는 이 모습에 대해 중공업과 자동차가 손을 잡고 MH측을 협공할 것으로 보는 시각도 없지 않다.
<홍석민·정위용기자>sm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