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입이 없다" 침묵의 현대…自救계획 設만 솔솔

  • 입력 2000년 8월 4일 18시 25분


현대측 관계자들은 3일부터 극도로 말을 아끼고 있다.

평소의 현대 같으면 정부의 압박에 대해 거친 비난의 목소리가 나올 법도 한 데 이번에는 자세를 낮추고 “정부 요구에 맞춰 주겠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현대측은 또 정몽헌(鄭夢憲)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이 5일 귀국, 정주영(鄭周永)전 현대명예회장에게 재가를 받은 뒤에야 정부와 공식적으로 협의도 하고 발표도 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계열분리 및 자구안에 대해 밑그림은 거의 완성했지만 정회장이 귀국해야만 뚜껑을 열 수 있다는 것.

가장 관심의 대상인 자동차 계열분리와 관련해 공정거래위원회는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가지고 있는 자동차 지분(9.1%)중 6.1%를 매각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안이고 차선책으로는 소유권이 더 이상 정 전 명예회장에게 없음을 확실히 하는 ‘매각에 준하는 안’을 내놓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현대측은 구체적인 언급은 피하고 있다. 현대 내부에서는 완전매각보다는 채권단에 담보로 맡기고 처분각서를 제출하는 등 매각에 준하는 형식을 취할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한때 검토했던 △아산재단에 위임 △사회 유력인사나 친족에의 매각이나 위임설은 수면 아래로 들어간 상태.

현대는 또 자동차 계열분리와 함께 당초 2003년으로 예정된 중공업 계열분리도 2년을 앞당겨 2001년까지 매듭짓기로 약속할 방침이다. 중공업이 현대건설 등 각 계열사에 보증을 한 액수만 1조원이 넘고 상호지분 해소도 시간이 걸려 정부요구대로 금년 내 분리는 무리라는 것.

이와 함께 현대는 올 연말까지 계획한 총 4조6000억원(기존 자구계획 3조7000억원+ 현대건설 추가 자구계획 9000억원)의 자구목표를 구체적인 일정과 함께 밝힐 예정이다.

채권단은 당초 현대건설의 자구목표 1조5000억원 가운데 서산농장을 담보로 자산담보부증권(ABS) 2000억원 발행 등 부동산 매각을 통해 7000억∼8000억원 가량을 확보한다는 계획이 실효성이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에 따라 현대는 고려산업개발과 현대강관 잔여주식 등 상장주식을 9월 이내에 장중 매각하고 비상장주식은 연내 지분양도 방식으로 정리하는 등 보유유가증권 매각을 통해 자금을 확보할 계획이다.

현대는 또 정부가 요구한 오너퇴진과 관련해 “정주영 전 명예회장과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은 경영일선 퇴진을 이미 선언했기 때문에 추가 조치는 필요 없고 기존의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할 방침이다.

정몽구(鄭夢九)회장에 대해서는 그룹측이 간섭하지 않겠다는 것. 현대자동차측은 “정몽구 회장은 이미 수 차례 밝힌 대로 물러날 계획이 없다”는 확고한 입장이다. 현대는 또 가신그룹 퇴진에 대해서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병기기자>eye@donga.com

▼지치고 힘든 王회장 "그래도 병원은 싫어"▼

정주영(鄭周永) 전 현대 명예회장을 최근 한달여 사이에 세 번이나 입원으로 몰아넣은 직접적 계기는 6월말 방북이었다. ‘왕회장’은 이번 방북 후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정전명예회장의 현재 상태에 대해 현대측은 공식적으로는 “단순히 노환으로 인한 피로감 때문에 입원한 것이지 건강에는 이상이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관가나 증권가에는 ‘위중설’마저 나돈다.

최근 ‘왕회장’을 직접 만나본 현대 핵심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위독하지는 않지만 한달간 식사를 거의 하지 못하고 영양제주사로 연명하고 있으며 고령까지 감안할 때 상당히 우려할 만한 상태’라는 것이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정 전 명예회장의 건강악화는 6월말 방북 때 보여준 그의 대북사업에 대한 ‘집념’과 무관하지 않다. 서울에서 평양까지의 장거리 승용차 이동, 평양에서 원산까지 비행기 이동 등 ‘강행군’이 85세의 ‘왕회장’에게 상당히 부담이 됐다는 것. 당시 의료진이나 일부 측근이 건강상의 부작용을 우려해 방북을 만류했지만 정 전 명예회장은 “내가 가지 않으면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을 직접 만나기 어렵다”며 북한방문을 고집했다.

‘왕회장’은 방북 후 급격히 기력이 떨어지고 식사를 거의 하지 못해 7월4일 한차례 입원했다. 병원에서 영양제주사를 맞고 잠시 기력을 회복해 퇴원했으나 그 이후에도 식욕을 회복하지 못하는 등 호전기미가 없어 7월30일과 이달 3일 다시 병원을 찾아야 했다.

현대의 한 핵심관계자는 “정전명예회장이 극도로 식욕이 부진하며 식사를 하더라도 죽 한 숟가락이나 생선초밥 한두개만을 먹을 정도”라고 말한다. 평소 그는 한끼에 생선초밥 8개 정도를 먹었다.

건강이 나빠지면서 ‘왕회장’은 김윤규(金潤圭)현대건설 사장 등 측근들과 매일 오전 10시반에 하던 점심식사도 7월 이후 거의 하지 못했다. 측근들도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왕회장’을 방문했다가 초췌한 표정으로 누워 있는 그를 보고 식사를 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일이 잦았다.

‘왕회장’은 또 방북 전에는 하루에 한 두시간씩 TV를 시청했으나 요즘은 TV시청에도 흥미를 잃고 힘겨워할 정도로 기력이 쇠해졌다는 것. 그러나 가족이나 측근들과 한두마디씩 가끔 대화를 나누기도 해 판단력이 떨어지지는 않았다고 현대측은 설명한다.

의료진은 정전명예회장이 몸에 특별히 이상이 있어 식욕부진을 보이는 것은 아니라 노환과 무리한 방북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식욕을 잃은 것으로 보고 당분간 병원에서 머물며 기력을 회복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하지만 ‘왕회장’은 병원생활을 싫어한다. 측근들도 ‘현대의 정신적인 지주’가 장기간 병원에 머물 경우 ‘건강이상설’이 확산되는 것은 물론 현대그룹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왕회장’이 가급적 빨리 퇴원해 집에서 머물기를 바라고 있다.

<이병기기자>ey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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