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현대라는 재벌의 2세만 아니었다면 두 사람은 누구보다 우애 좋은 형제로 남았을지 모른다. 8형제의 차남으로 먼저 작고한 형 대신 장남의 역할을 떠맡은 몽구와 5남으로 몽구보다 열살 아래인 동생 몽헌. ‘형제간에는 우애가 제일’이라는 가르침을 받으며 자라난 형제들이었기에 재계에서는 ‘모범적인 집안’이라며 부러움을 보냈다.
그러나 두 사람이 형제가 아닌 ‘경영자’로 만났을 때, 우애는 양보 없는 경쟁에 밀려나야 했다. 경영수업에 먼저 들어간 것은 몽구. 74년 현대자동차써비스 대표이사를 맡았다. 몽헌은 7년 뒤인 81년 현대상선을 시작으로 84년 현대전자를 맡아 아버지로부터 능력을 인정받는다. 86년부터 형은 현대정공 인천제철 현대산업개발 현대강관을 자기 휘하에 편입했다. 몽헌도 사십을 넘긴 88년부터 현대상선과 현대엘리베이터를 맡으면서 본격적인 후계 구도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이때까지의 경쟁은 아직 물밑에서 이루어지는 상태. 아버지의 절대적 카리스마가 그룹을 통치하던 시절, 둘은 각자 역량을 키우면서 아버지의 눈에 들려고 애썼다.
96년 MK의 현대그룹 회장 취임은 물밑 경쟁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몽구가 회장에 오르긴 했으나 아버지는 그에게 ‘단일 후계자’라는 낙점을 주지 않았다. 몽헌을 부회장에 앉혀 사실상 투톱 체제를 형성한 것.
2년 뒤 몽헌은 다시 공동회장에 올랐다. 경쟁은 이때부터 ‘포말’을 일으키며 완전히 가시화됐다. 두 사람의 뒤로는 각각 주군을 ‘하나의 태양’으로 옹립하려는 가신들이 길게 줄을 늘어섰다.
2년여 전개되던 레이스는 몽구의 자동차 인수와 독립으로 원만히 마무리되는가 싶었다. 그러나 올들어 두 형제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향해 돌진했다.
아버지의 카리스마가 약해지면서 둘을 이어주던 ‘끈’은 힘없이 끊어졌다. 두 형제와 두 사람의 운명에 명운을 건 가신들은 생사를 건 듯이 거세게 부딪쳤다. 무자비한 비방과 고성이 오갔다.
양측간에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그 파열음은 현대 집안의 파열음이었을 뿐만 아니라 수명을 다한 한국 재벌 체제의 비명이었다.
이제, 두 사람의 승부는 일단 끝났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아버지가 지켜주던 온실에서 나와 각각 진정한 ‘정글’로 들어섰다. 어쩌면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인 셈이다.
<이명재기자>mj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