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가진 증시, 까놓고 얘기해보자"

  • 입력 2000년 9월 16일 18시 37분


증시가 수렁에 빠졌다.

나름대로 투자자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해온 사람으로서 뭐라 할말이 없다.

그러나 솔직히 까놓고 얘기해야 할 시점이다.

점잖지만 비현실적인 조언은 더 이상 필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점에서 ‘절대로 예단하지는 말라’는 말을 가장 먼저 하고 싶다.

장마철에 볕 나는 날 있듯이 침체장에서도 이따금씩 장이 서곤 한다. 이럴 때 치고 빠지기를 잘해서 손실을 줄이는 수밖에 없다.

시장상황이 변하기 전까지는 아예 증시를 떠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대세는 이미 망가졌다. 장기투자는 절대로 삼가는 것이 좋다. 주가가 워낙 많이 떨어지다 보니 우량주 저점매수를 권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지금 사서 언제까지 갖고 있으라는 말인가. 1∼2년 뒤 주가가 좀 오른다손 치더라도 그 동안의 마음 졸이는 고통은 어찌하란 말인가. 대세상승장에서는 잘못 샀더라도 좀 기다리면 만회할 기회가 온다. 대세하락장에선 한번 삐끗하면 왕창 날리기 쉽다. ‘대세 따로, 투자 따로’는 말처럼 쉽지 않다.

구조조정이 어정쩡하게 진행중인데다 대세마저 꺾인 마당에 펀더멘털론은 안통한다. 최근 국제유가 급등, 반도체가격 하락 등의 경험에서 드러나듯이 우리경제는 아직까지는 ‘유리알 경제’다. 잘 나가다가도 외풍이 불면 한순간에 망가진다.

본질적인 구조조정이 안됐기 때문이다. 중후장대한 재벌을 해체하는 구조조정은 그럭저럭 진행됐지만 벤처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대안세력은 아직 터를 잡지 못했다. 코스닥은 한바탕의 머니파티로 막을 내릴 모양이다.

런 상황에서 외국인투자자들이 삼성전자 한 종목의 지분을 2∼3%가량 줄이면서 증시가 망가지기 시작했다. 만약 외국인들이 지분을 10% 더 줄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도 펀더멘털 타령만 할 것인가. 주가가 빠졌다 하면 ‘국내증시가 상대적으로 저평가돼 있다’는 말이 고개를 쳐든다. 도대체 무엇에 비해 얼마나 저평가돼 있다는 것인가.

외국인 비중이 30% 가량이나 된 요즘 상황에서는 외국인이 사는 종목은 따라 사기보다는 팔 시점을 고민하는 게 옳다. 외국인 지분은 일정수준을 넘어서면 주가상승이 아니라 주가하락의 동인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펀더멘털론이 투자자의 가슴을 짓이긴 것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95년 11월 삼성전자 주가가 1주일 사이에 17만원대에서 14만원대로 폭락했다. 미국 메릴린치증권의 토머스 쿨락이라는 애널리스트가 ‘반도체 경기가 꺾였다’는 진단을 내린 것이 그 즈음이었다. 하지만 국내 애널리스트들은 모르는 소리 하지 말라며 조만간 경기가 바닥을 찍고 대세가 상승할 것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삼성전자 주가가 4만원대로 추락한 96년 말까지 이런 대세상승론이 유행했다. 경기나 주가와 관련해 논란이 불붙어 상황판단이 잘 안될 때는 과거 우리 증시의 역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날그날의 단기시황에 빠지기 쉬운 시장분석가(스트래티지스트)들의 얘기를 곧이듣는 것도 대세판단을 그르칠 수 있다. 더군다나 종목 및 업종 분석을 전문으로 하는 애널리스트들의 분석을 그대로 투자에 연결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들이 말하는 적정가격은 모형을 근거로 계산해낸 교과서적인 가격이다. 경제 정치 사회 등 모든 여건이 정상일 때 근접할 수 있는 가격일 뿐이다.

정의석(신한증권 리서치센터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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