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나스닥에서는 지난해 380개 기업이 퇴출됐다. 이 중 20개가 부도가 났고 360개는 다른 기업에 먹혔다(인수합병·M&A). 또 현금흐름이 좋지 않은 기업 명단이 ‘가차없이’ 공개돼 기업퇴출을 촉진시킨다. 대신 300개 이상의 신생기업이 상장됐다.
그러나 국내 벤처업계는 5월부터 사실상 돈 유입이 끊겨 ‘고사직전’ 상태이지만 퇴출된 벤처기업은 그리 많지 않다. 이른바 다산소사(多産小死)의 구조다.
아시아벤처캐피털 서동표 사장은 이에 대해 “벤처업계는 많은 기업이 태어나고 또 경쟁력이 떨어지는 기업은 빨리 사라져야 한다”면서 “한국에서는 퇴출돼야 할 기업이 생명을 연장하는 바람에 경쟁력 있는 기업도 함께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M&A가 안된다〓미국 벤처기업의 90% 이상은 M&A에 의해 퇴출된다. 그러나 국내에서 성공적인 M&A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금용 인터넷기업협회 회장은 “현재 200여개의 벤처기업이 비공개리에 매물로 나와 있지만 M&A 성사 사례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우선 문화적인 요인이 큰 걸림돌.
배종태 KAIST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는 “실리콘밸리에서는 기업 역시 상품이라는 인식 때문에 기업퇴출통로의 90% 이상이 M&A인데 반해 국내 벤처창업자들은 기업을 자신의 분신으로 생각해 넘기기를 꺼린다”고 지적했다.
직원들의 인식도 마찬가지. 자신이 일하던 기업이 넘어가면 핵심인력들은 다른 회사로 떠나버린다. 벤처기업의 가치 중 상당부분은 핵심인력인데 이들이 떠나니 인수자 입장에서는 M&A를 꺼릴 수밖에 없다.
합병과 관련한 세금도 만만찮다. 이금용 회장은 “100억원에 팔아도 손에 60억원밖에 쥐지 못한다”며 “합병관련 세금이 40%에 이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망하고 싶어도 망할 수 없다〓실리콘밸리에서 실패의 경험은 곧 훈장이다.‘시행착오를 겪은 경험 자체가 자산’이라는 시각 때문에 실패한 CEO가 또 다른 벤처를 창업하면 창업투자회사는 기꺼이 돈을 댄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파산한 벤처기업의 창업자에게는 ‘실패자’라는 낙인이 찍혀 좀처럼 재기의 기회가 오지 않는다.
또 국내에서는 벤처창업자가 초기에 창업자금을 대부분 자신이나 친지의 부동산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받으므로 부도가 나면 자신의 희생이 너무 크다. 결국 ‘가는 데까지 가보자’는 식으로 버틸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병기기자>ey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