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자들은 올 8월까지만 해도 “제발 경기가 빨리 식어 금리를 올리지 않아도 됐으면…”하고 바랐다.
지금 투자자들의 바람은 정반대다. “제발 경기가 천천히 식었으면…. 아니면 차라리 화끈하게 경착륙을 해서 금리를 내려야 하는 상황이 왔으면….”
그런데 거시경제지표가 ‘모 아니면 도’ 식으로 ‘연착륙 아니면 경착륙’으로 딱 부러지게 나오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거시경제지표가 나올 때마다 어떤 해석이 우세하느냐에 따라 투자자들은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고 한다.
11월 30일의 경우가 그랬다. 이날 3·4분기 경제성장률 수정치가 2.4%로 나왔다. 그러자 처음에는 “당초 예상치인 2.2∼2.3%보다 높게 나왔다”며 이를 연착륙을 시사하는 지표로 해석되면서 주가가 급등했다. 그러나 곧이어 나온 ‘4년 만의 최저치’라는 해석이 분위기를 휘어잡으면서 주가는 급락세로 반전했다.
▽경착륙이란〓경기가 급강하하면서 실업 급증, 기업수익성 급감 등의 부작용을 낳는 현상. 연착륙의 반대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연착륙이란 보통 잠재성장률(한 나라 경제의 모든 가용자원(可用資源)을 다 생산에 활용할 경우의 경제성장률) 이상 수준에서 잠재성장률 수준으로 곧바로 안착하는 현상으로 정의된다.
미국의 경우 잠재성장률은 연평균 3.0∼3.5%로 본다. 연착륙이냐 경착륙이냐는 지금까지의 경제성장 속도나 향후 경제여건 등에 따라 기준이 달라진다. 전문가들은 미국 경제가 최근 1년 이상 5∼8%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점을 감안할 경우 대체로 두 분기 이상 1% 미만, 또는 한 분기 이상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할 경우를 경착륙으로 본다.
▽실물 연착륙과 증시 경착륙〓미국 경제가 경착륙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미국 증권가의 대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경기둔화를 보여주는 거시경제지표나 일부 대기업들의 향후 수익성 악화 전망이 발표되자 미국증시가 요동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실물경제가 연착륙하더라도 증시는 경착륙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해준다.
왜 그럴까.
어느 때보다도 불확실성이 높기 때문이다. 미국 경제는 지금까지 아무 탈 없이 10여년의 호황을 구가해왔다. 투자자들은 10여년간 경기둔화의 충격에 단련이 돼 있지 않은 것. 더구나 경제체질도 많이 바뀌었다. 여전히 거품논란이 뒤따르고 있는 ‘신경제’라는 새로운 경제구조가 경기순환을 어떻게 견뎌나갈 것인지에 대해 아무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또한 세계 경제성장 원동력의 50% 이상을 설명하는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아시아 등 세계 전역이 거의 동시에 경기둔화 국면으로 빠져들고 있다. 경기둔화가 전 세계에 걸쳐 상승작용을 일으킬 경우 그 충격은 예상 외로 클 것이라는 분석이다.
따라서 연착륙인지 경착륙인지가 최종적으로 판가름나기 전까지 미국 증시는 큰 폭으로 오르내리는 불안한 양상이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전망과 국내증시에 대한 영향〓미국 증권가에서 나스닥지수가 2500선 이하로 빠지는 등 증시경착륙을 우려하는 전문가들은 사실상 많지 않다. 미국 증시전문가들의 90% 이상은 나스닥이 조만간 바닥을 탈출해 오름세로 반전할 것을 믿고 있다.
하지만 이런 다수의 전망이 11월중순 이후 계속 틀린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투자자들의 심리가 그만큼 불안하다는 것. 바야흐로 기업들이 4·4분기 기업수익 전망을 고백하는 ‘프리어나운스먼트 시즌’에 돌입한 만큼 다들 중장기적으로는 나스닥지수의 상승반전을 점치지만 단기전망은 자신있게 내놓는 사람이 없는 상황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국내증시도 연말까지는 주가등락을 점치기 힘든 장세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최근들어 국내 구조조정이 지지부진해지면서 미 증시와의 동조화 현상이 더욱 심해졌다.
<이철용기자>lc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