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은 몰려드는 자금을 기업대출보다는 국공채를 매수하는데 썼다. 이에 따라 3년 만기 국고채 유통수익률이 연 6%대까지 떨어지는 등 지표금리는 크게 안정됐다. 그러나 기업들은 돈줄이 막혀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 때보다 더 어려운 사상 최악의 자금난을 겪었다.
또 은행의 수시입출금식예금(MMDA)과 투신권의 머니마켓펀드(MMF·단기금융상품) 등에도 자금이 몰렸다. 종합주가지수가 반토막이 나고 코스닥지수는 79.4%나 폭락한데다 자금시장이 불안해지면서 보다 나은 투자기회를 엿보기 위해 대기 자금화하는 경향이 높았다.
▽시중자금 투자신탁에서 은행으로 대이동〓올들어 11월까지 투자신탁 수탁고는 42조8250억원이나 감소했다. 은행의 금전신탁도 37조2597억원 줄었다. 종금사 수신도 2조3592억원 감소했다. 주식시장이 장기침체에 빠져 수익률이 마이너스 50%를 넘는 주식형 수익증권이 속출한데다 투신사들이 대우사태 이후 부실채권 정리와 관련해 고객의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한국 중앙 한스 영남 리젠트 등 종금사들이 무더기로 문을 닫음으로써 종금업계는 존립 자체가 어려워지는 상황이 됐다.
주식시장 침체를 반영해 고객예탁금은 875억원 늘어나는데 그쳤다. 한때 12조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하기도 했으나 11월말에 7조794억원으로 감소했다.
반면 은행예금은 85조8132억원이나 늘었고 우체국 체신예금도 6조544억원 증가했다. 한국은행 박재환(朴在煥)금융시장국장은 “종금사와 신용금고가 무더기로 영업정지되는 등 금융불안이 높아지면서 수익성에 치중하던 고객들이 안전성을 중시하는 ‘질(質)로의 도피’(escape to qua―lity)가 시중자금 흐름을 크게 좌우했다”고 설명했다.
▽단기대기성 자금도 급증〓올들어 MMF 수탁고는 9조5160억원 늘었다. 투신의 전체 수탁고가 42조원 이상 감소한 것과 비교할 때 크게 대조적이다. MMF는 3개월만 맡겨도 7% 안팎의 높은 금리를 주는 단기상품. 주식 등 다른 좋은 투자대상을 찾을 때까지 잠시 돈을 맡겨두는 곳으로 이용된다. 은행의 수시입출금식 예금의 하나인 MMDA도 2조2317억원 늘었다. 양도성정기예금(CD)과 환매채(RP) 및 표지어음 등 은행권의 단기상품도 9조4738억원이나 증가했다. 표지어음 등은 선이자를 떼기 때문에 내년부터 시행되는 금융소득종합과세를 피할 수 있다는 점이 부각되며 연말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기업은 사상 최악의 자금난에 시달려〓은행으로 들어간 자금이 기업으로 흐르지 않고 국공채와 극소수 우량기업의 회사채(AA급 이상)로 몰려 대다수 기업들은 극심한 자금난을 겪었다. 국고채 수익률은 1월에 연 9.3%에서 12월 중순에 6.5%까지 떨어졌다. A급 회사채 수익률도 10.26%에서 8.12%로 급락했다.
언뜻 보면 자금시장이 크게 안정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안전한 국공채와 우량회사채에 자금이 몰린 데 따른 ‘착시현상’일 뿐이다. BBB급 이하 회사채는 신규발행은 물론 만기연장(차환발행)도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다. 국제결제은행(BIS)기준 자기자본비율을 맞춰야 하는 은행들은 가능한 한 기업대출을 억제했다. 11월중 어음부도율이 0.65%로 급등할 정도로 기업자금사정은 크게 어려워지고 있다.
서울은행 서종한(徐鍾漢)자금부장은 “이익을 많이 내는 우량기업은 주식발행을 통해 자금을 조달해 부채를 줄이고 자사주를 매입한 반면 그렇지 못한 기업들은 발행시장 채권담보부증권(프라이머리 CBO)처럼 정책지원을 받아 겨우 회사채 만기를 연장하는 양극화현상이 심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굿모닝증권 이승조(李承祚)법인금융영업부장도 “투자신탁이 고객자금 이탈로 회사채 매입을 통한 산업자금조달 기능을 못하고 있다”며 “기업이 구조조정을 통해 신용을 높이고 금융구조조정도 이뤄져야 시중자금이 회사채나 기업대출로 옮겨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홍찬선기자>hc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