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자동차 철강 반도체처럼 신산업은 수조원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투자비가 필요한 분야. 그러나 ‘기업의 수익성’이 강조되는 상황에서 어떤 그룹이 과감하게 신산업에 진출할 것이냐는 질문이었다.
누구도 선뜻 답하지 못했다. 이제 한국에서 재벌주도의 대규모 신산업투자는 불가능한 것일까.
▽신산업 투자의 명과 암〓1983년 2월 고(故) 이병철 삼성회장은 1년간의 고민 끝에 반도체진출을 결정했다. 반대론이 극심했다. 그러나 이 회장은 자신의 결정을 밀고 나갔다. 삼성의 전 직원과 계열사의 역량을 총동원했고 삼성전자는 10년 만에 세계일류의 반도체 기업으로 우뚝 섰다.
자동차 조선 철강 등 주력산업은 대부분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재벌총수나 대통령의 결단, 계열사 인력과 자금의 총력동원, 정부와 금융기관의 지원 등이 삼위일체가 돼 이루어진 것.
대기업의 신산업진출이 긍정적인 효과만 가져온 것은 아니다. 정부나 기업의 무리한 결정이나 석유화학 한보철강 삼성자동차 등의 사례에서 보듯 과잉투자 때문에 한국 경제가 지금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상당수의 외국전문가들은 “한국 대기업은 정부와 금융권의 특혜로 막대한 투자비를 끌어들였지만 대부분 시장이자율에도 못 미치는 투자수익률을 나타냈다”며 “기업의 임무인 ‘가치창조’에 실패한 것이 신산업진출의 역사”라고 혹평하고 있다.
▽과거의 방식은 이제 불가능하다〓업계에서는 “기업지배 및 자본시장의 구조가 달라졌고 무역마찰 때문에 과거 방식의 신산업육성은 불가능하다”고 못박는다.
삼성그룹의 경영전략 담당 임원은 “만약 삼성이 그룹 차원에서 새로운 사업에 진출한다고 결정하고 전 계열사에서 막대한 돈을 투자한다고 나선다면 전 계열사의 주가가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라며 “외국인이 국내 주요기업 주식을 30% 이상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결정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국내 소액주주들도 반대하고 나설 것은 뻔하다. 리젠트증권 김경신 이사는 “주식 투자자는 기본적으로 불확실성을 싫어하는데 기업이 앞날이 보장되지 않은 신산업에 진출한다면 어떤 투자자가 이를 반기겠느냐”고 말했다.
통상마찰 때문에 정부가 특정기업을 지원하는 것도 어렵다. 은행의 지원도 곤란하다.
삼성경제연구소 고정민 수석연구위원은 “개별은행의 생존 때문에 정상적인 기업대출도 잘 안 되는데 은행이 큰돈을 신산업투자에 대출해주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신산업정책이 필요하다〓산업연구원의 김도훈 박사는 “과거의 방식은 부작용도 많고 여건상 실행이 어렵지만 신산업육성은 여전히 필요하다”며 “정부와 기업의 역할분담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미국이 국방예산을 통해 정보기술(IT)산업의 기반을 마련, 기업들이 개발된 원천기술을 이용해 창업에 나선 것이 좋은 예. 일본도 이러한 산업정책을 바이오산업육성에 적용하고 있다.
투자위험이 크고 투자비가 엄청난 부분을 정부가 나서서 기술을 개발한 뒤 기업이 이 기술을 이용해 사업화에 나설 수 있도록 산업정책이 변화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병기기자>ey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