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의 정부성토 배경과 내용]"감놔라 배놔라에 기업멍든다"

  • 입력 2001년 5월 9일 18시 32분


“정부가 개별 현안에 대해 제도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말로만 얼버무리려 한다.”

“사사건건 ‘높은 쪽’의 눈치만 보기 때문에 무엇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 설령 해결책을 내놓더라도 기술적으로 서툴다.”

△"말로만 기업하기 좋은 나라"△

최근 열린 A그룹 주요 계열사의 기획담당 임원회의. 각종 정보를 교환하고 그룹 차원의 대응책을 논의하자는 취지로 마련된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정부 정책을 성토했다.

이날 회의의 결론은 “현 정부는 경제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 같다”는 것. 한 임원은 “정부가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만들겠다고 거듭 다짐했지만 우리가 느끼기에는 기업하기가 더 힘들어졌다”며 “당분간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있는 게 상책이라는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심상찮은 재계 기류〓일방통행식 경제정책에 대한 재계의 불만이 봇물 터지듯 나오고 있다. 민병균(閔丙均) 자유기업원장, 좌승희(左承喜) 한국경제연구원장, 박용성(朴容晟) 대한상의 회장 등이 약속이라도 한 듯 정부 개혁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나섰다. 대한항공이 최근 빅딜의 폐해를 공개 거론하는 등 기업체 현직 임원들도 정부의 실정을 공박한다.

관(官)의 심기를 살펴야 하는 한국적 현실에서 민간 경제계 인사들이 이처럼 강도 높게 비판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 일각에서는 현 정권 출범 직후 외환위기의 ‘원인 제공자’로 몰려 움츠러들었던 대기업들이 집권 후반기의 ‘레임덕’ 풍조에 편승해 제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경제침체로 위기의식 확산△

그러나 재계는 전세계적인 경기침체의 골이 깊어지면서 기업들의 위기의식이 한층 절박해졌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전경련 김석중(金奭中) 상무는 “정부가 기업의 요구를 외면한 채 개혁이라는 구호에 집착하는 동안 기업경쟁력은 속으로 곪아 가는 실정”이라며 “재계의 주장은 기업 경영의 현실과 특성을 존중해 달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재계의 요구〓기업이 전략적으로 결정해야 할 내부통제구조와 재무 및 사업구조 등에 대해 정부가 일일이 간섭하는 현재의 재벌 정책은 시장경제 원리와 어긋난다는 재계의 주장이다. 재벌개혁을 명분으로 부채비율 등 항목마다 수치를 정해 놓고 이 비율을 맞추도록 강요하는 바람에 기업들이 시장 상황에 맞춰 운신할 수 있는 여지가 원천 봉쇄됐다는 항변도 나온다.

재계는 이번 기회에 출자총액제한제와 부채비율 200%의 획일적 적용 등 대표적인 족쇄를 풀겠다는 태세다. 하지만 정부와 재계의 마찰이 전면전으로 치달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지난해에도 전경련 회장단이 30대 그룹 지정 제도의 개선을 요구했다가 정부로부터 ‘구조조정본부를 폐지하라’는 역공을 받은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 16일 열리는 30대 그룹 구조조정본부장과 경제장관의 간담회는 감정적인 논쟁보다는 경제 논리에 바탕을 둔 가운데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박원재기자>parkwj@donga.com

▼이 공정위장 강경발언 의미 "재벌 반기에 쐐기"▼

“재계의 주장은 기업 오너(대주주)들의 불평을 그럴 듯하게 포장한 것으로 공정거래위원회의 규제가 마치 정상적인 기업활동에 발목을 잡는 것처럼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이남기(李南基) 공정거래위원장이 9일 이례적으로 기자간담회를 자청하면서까지 전경련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한 것은 봇물처럼 터지는 재계의 목소리를 그대로 둘 경우 앞으로 구조조정 추진과정에서 심각한 차질을 빚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공정위는 진념(陳稔) 부총리가 4일 고려대 경제인회 간담회에서 ‘불필요한 규제를 풀겠다’는 발언을 한 이후 전경련 대한상의 등에서 정부 규제를 비난하는 발언이 도를 넘어섰다고 여기고 있다.

이 위원장은 이날 재계의 주장을 시종일관 비판하면서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부 성과도 있었지만 차입경영에 의한 재벌들의 선단식 경영과 재벌총수의 영향력 확장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공정위 조사가 기업의 발목을 잡는다는 것은 마치 음주운전 단속이 불편하니까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과 같은 논리”라며 “정부가 있는 한 기본질서로서의 규제를 제정하고 집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재계의 공격대상인 30대기업 집단 지정제도와 출자총액제한 제도 등을 설명하는 과정에서는 재벌들이 엄살을 떨고 있다면서 재고(再考) 가능성을 일축했다. 그는 규제폐지 주장은 ‘어불성설’이고 재계의 논리전개는 ‘앞뒤가 바뀐 것’이라는 원색적 표현을 마다하지 않았다.

일부 경제전문가들은 정부와 재계의 맞대결에 공정위가 앞장서 ‘교통정리를 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최근 열린 민주당 최고위원 워크숍에서 ‘개혁 마무리론’이 제기된 데 대해 청와대 대변인이 ‘상시(常時) 개혁론’을 펼친 것과 관련해 공정위가 청와대측의 논리를 실행하는 첨병 역할을 한다는 분석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경제가 얼어붙은 데다 신문고시(告示) 제정 등으로 공정위가 언론사와 냉랭한 관계인 점을 틈타 재계가 전방위 공세로 나오고 있다”며 “이런 움직임을 조기에 차단하기 위한 포석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최영해기자>money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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